한글날은 이름만 국경일일 뿐 마지못해 치르는 기념행사일로 전락했다. 그런데 올해는 연초부터 유별난 주목을 받았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선풍적인 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압도적 다수로부터 지지를 받는 한글날 공휴일 지정 운동 덕이 컸다.
한글학회와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가 발동을 걸었고, 찬반 논란이 많은 정부 안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운동의 총대를 멨으니 불은 쉽게 붙었다. 여기에 민주통합당이 지난 5월 19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관련 법안을 발의했고,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차원에서도 공감대가 넓다. 문제는 담당부처인 행정안전부다. 법정 공휴일이 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업들의 눈치를 보는 청와대와 경제부처 때문에 뭉그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반대 이유는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한 1991년이나 비슷하다. 당시 총무처는 이완된 사회분위기를 바로잡고, 연휴를 줄여 수출부진 등 업계의 어려움을 타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영세민 취로사업 감소와 병원 휴무로 인한 불편 따위의 핑계도 댔다. 지금도 자영업자 수익 및 일용직 노동자 일감 감소 따위를 대는 건 그때와 판박이다. 산업구조 재편 등으로 근거가 사라진 주장들이다. 오히려 공휴일 지정이 생산성 향상, 고용 확대, 내수 촉진 효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이 더 많다.
반대론이 간과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의 구성 요소가 영토, 국민, 주권이라지만, 국가 정체성 형성의 근본은 말과 글이다. 한글은 일제의 병탄과 남북 분단 상황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지켜준 버팀목이었다. 그런 한글을 무시하면서 애국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금 한글은 이 정부의 영어 중시 정책으로 말미암아 2등 언어로 밀려날 판이다.
 
한글은 우리의 자랑일 뿐 아니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다. 창제의 주체, 원리, 목적, 철학이 뚜렷한 세계 유일한 언어가 한글이다. 발성 구조와 철자를 일치시켜 세계의 어떤 말이든 표기할 수 있고 또 표기된 것을 소리로 재현할 수 있다. 이런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문서의 작성, 전송 그리고 음성 인식 등 디지털 시대에 뛰어난 효율성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창제의 위민정신은 모든 위정자의 본이 된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국력에 실려 언어가 확산됐다면, 이제는 국력이 문화의 힘에 의존한다. 한글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최고의 소프트파워다. 문화로 승부를 걸겠다면 당장 한글 르네상스를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한 첫발은 공휴일 지정에서 떼야 한다. 더 미룰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