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이야기로 뜨거운 요즈음이다. 영화 관객은 500만에 달하고, 완역본 소설도 15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뮤지컬도 만석이고, 앨범 판매량도 기록적이다. 해설기사도 넘쳐난다. 즈음하여, 나 자신의 레미제라블을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자격은? 한평생 그 책과 함께 살아온 “독자”로서 말이다.
열살 때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촌놈이라 놀리는 텃세 아래서, 거의 왕따가 되었다. 도망갈 곳은? 학교 도서실밖에 없었다. 자주 가다 보니 책 읽는 재미가 붙었다. 책벌레 동생을 위해 누나가 사온 책이 <레미제라블>이었다. 그대로 빨려들어갔다. 거의 매일, 읽고 또 읽었다. 저녁에 미리엘 주교를 접하고, 자정이 가까우면 물 길으러 나온 불쌍한 코제트를 만나고, 코끝 시린 새벽에 이르면 하수도 속의 장 발장과 떨며 만났다. 이렇게 주인공들과 함께 쫓기고 아파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암울한 유신체제하에 대학생이 되었다. 캠퍼스는 때로 최루탄 얼룩진 전장이 되었다. 학우들이 처절하게 끌려가는 가운데, 변혁을 꿈꾸는 대학생들은 각국의 혁명사를 탐독했다. 혁명의 고전인 프랑스혁명이 빠질 수 없었다. 완역본으로 대한 <레미제라블>은 한마디로 민중의 다채로운 삶을 녹여낸 프랑스혁명사였다. 낡은 체제, 전쟁의 참상, 수도원의 역사, 도시의 부랑아들, 심지어 하수도의 역사에까지 전방위적 지식이 펼쳐졌다.
청년 시절을 사로잡은 장면은 바리케이드의 밤이었다. 1832년 6월5일, 항쟁에 나섰다가 장렬히 산화한 청년들은 바로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청년들뿐만 아니었다. 생애 마지막에 숨겨둔 정열을 불태우고 죽어간 마뵈프 노인,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종 유쾌했던 부랑아 소년 가브로슈, 마리위스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내던진 장 발장까지. 그들의 비극이 우리의 현실과 겹쳐지면서 청년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30대 초반에 런던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처음으로 봤다. 극장 제일 뒷자리에서도 감동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노랫말이 전달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 나름대로 수십번씩 그려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사악한 환경에서 때로 나쁜 짓을 거들면서도 연정을 소중히 간직했던 에포닌의 존재가 새삼 부각되어 왔다. 청년기까지는 자신을 주연급이나 조연급으로 생각하다 나이가 들수록 엑스트라에게도 눈길이 간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다시 보면 작가가 엑스트라 한명 한명에도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지 생생한 느낌이 온다.
학자로서 형사법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고집스런 냉혈한으로만 보였던 자베르에 대한 생각도 도전받았다. 직분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오류에 대해 사표로 책임지고, 양심의 가책 앞에서는 끝내 자살을 택하는 그런 공직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장 발장의 입장에서 형사제도는 잔혹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탄핵될 수 있다. 전과자에 대한 냉대가 오히려 그를 더욱 나쁜 길로 내모는 건 아닌가. 사랑이 없는 억압이 과연 어떤 개선효과를 가져올까. 이 시대의 장 발장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나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보잘것없는 군상들이다. 세속적으로 보면 장 발장은 전과자이자 도망자, 팡틴은 미혼모와 창녀, 코제트는 버림받은 고아, 가브로슈는 도시의 부랑아, 마리위스는 폭도다. 경제적 궁핍에 더하여 각종 편견과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처지다. 열악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사랑하고, 보살피고, 연대하고, 항거한다. 사악한 제도와 관습의 굴레 아래서도 자애와 연민, 사랑을 통해 살아갈 만한 세상으로 변주시킨다. 비난받아 마땅할 듯한 사람들이 펼쳐내는 치열한 삶의 몸부림을 통해, 작가는 누구나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영화와 뮤지컬, 소설을 비교하면 어떤가 하는 물음을 종종 접한다.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에게 이 소설은 읽을수록 재미를 더하고, 생각거리가 더해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국 어디든, 완독한 독자가 열명이라도 모인다면, 거기 달려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 한인섭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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