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정책에서도 세계를 주름잡는다. 미국의 경제모델은 다른 나라 엘리트들 사이에선 따라가거나 배워야 할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여기엔 미국이 20세기에 대표적인 경제대국으로 성공해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미국이 국제기구 등을 통해 따라하기를 강요한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전세계의 많은 경제학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한 것도 물론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 모델이 1980년대 이후 전세계에 퍼졌다.
1980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채택한 이른바 ‘공급주의 경제학’(감세가 노동 공급과 투자 확대를 유도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세수를 확충한다는 이론)이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무려 28%로 인하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그런데 미국식 모델의 핵심인 이 감세 정책이 이번에 된서리를 맞았다. 감세를 정강으로 채택하고 있는 미국 공화당이 20년 만에 증세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감세정책이 세수를 늘리기는커녕 대규모 재정적자를 초래한 것으로 드러난데다, 지난 대선에서 민심이 증세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세제 부문에서 이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연소득 45만달러 이상 가구(상위 1% 소득가구)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이다. 과거와 달리 전 소득계층에 대해 세율을 올린 게 아니라 상위 1% 고소득층에 한정해 인상을 한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 사회가 최근 30여년간 승자독식 모델을 따르면서 ‘1% 대 99% 사회’로 불릴 만큼 급변한 점이 세제에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에 부가 몰린 만큼 이들의 세 부담을 늘린 셈이다.
둘째는 급여세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세의 인상이다. 미국의 직장인들이 노후연금 등을 위해 매달 월급에서 떼는 이 세금을 4.2%에서 6.2%로 올렸다. 이 세금의 인상으로 늘어나는 세수가 10년간 1150억달러(약 128조원)에 이른다. 대상자는 미국 가구의 77%나 된다. 민주당은 애초 이런 증세가 경제에 미칠 충격을 우려해 인상을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공화당이 여기에 찬성했다는 후문이다. 공화당으로서도 빈부격차 확대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 수요를 감당하려면 복지재정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이를 ‘복지증세’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 보수파도 미국의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경제이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른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적어도 못하지는 않다. 복지 수요가 팽창하는 와중에도 이명박 정부가 대규모 감세정책을 편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복지 확충을 공약으로 내걸면서도 증세를 통해 복지재정을 늘리는 데는 미온적이다.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비과세·감면 축소를 통해 재원 확충을 하겠다는 얘기는 역대 정부가 매번 해온 것으로, 의미 있는 수준의 복지재정 확충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한국의 보수파가 최소한 미국 공화당이 이번에 변한 만큼만이라도 변했으면 한다.
< 한겨레신문 박현 워싱턴 특파원 >
< 한겨레신문 박현 워싱턴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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