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며칠 전 진풍경이 벌어졌다. 4년간이나 국가안위를 책임졌던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이 퇴임하자마자 출국한다는 소문에 시민들이 ‘도주’를 저지하겠다고 진을 친 것이다. 이들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사진과 ‘해외도피 하지 마세요’ ‘원세훈은 출국금지’ 등 팻말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는 그 시각에 출국장 앞을 지켰다.
이에 앞서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명백히 밝히라며 경찰에 사표를 던졌던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이런 내용의 영문 경고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전세계 공항, 이민국, 언론에 대한 경고: 한국국적의 도망자, 전 국정원장 원세훈이 귀국에 입국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원세훈은 심각한 범죄혐의로 고발되어 있으며, 검찰로부터 출국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아무리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고소·고발되었다고는 하나, 며칠 전까지 국가의 정보를 한손에 틀어쥐고 흔들던 위세 당당한 인물이 돌연 해외로 피해간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요, 출국금지 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들의 노성이 들끓더니 ‘못믿겠다, 직접 막겠다’며 시민들이 공항출구를 지킨 희한한 모습에, 더욱이 인터폴 수배와도 같은 경고문까지…. 도대체가 코미디인지, 드라마인지 웃지 못 할 사건이요, 대한민국의 현 수준과 형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엽기적인’ 소극이어서, 실로 탄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렇게 자랑하던 ‘국격’의 실상이 바로 그 정도임을 그의 충복이었던 원세훈 씨가 전세계에 과시한 셈이다.
세계 어느 민주국가의 정보기관 수장이 퇴임하자마자 해외로 튀겠다고 해서 법석이 인 곳이 있을까. 미국의 CIA, 즉 중앙정보국장이 물러나자마자 외국에 도피하겠다는 일이 상상이나 가능한가?
과거 박정희 정권하에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해임된 뒤 4년 만에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 의혹을 캐기 위해 미국 의회가 연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하다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그는 암살설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역시 박정희 시절 비서실장과 중정부장을 지낸 이후락도 중정부장 해임 뒤 국외로 비밀리에 도피했다가 박 대통령의 신변보장 약속을 받고 국내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독재정권 치하의 사건들 이후 ‘원세훈 도피시도’가 벌어진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돌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희대의 해프닝이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어떤 곳인가. ‘국가의 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보안·범죄수사’를 담당하는 최강 기관이며 최고의 국가기밀을 다루는 곳이다. 국제적 정보전쟁, 특히 남북분단 상황에서 북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대처할 대북 첩보전의 책임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벌한 글로벌 외교·무역·산업·사이버 정보전을 포함해 나라와 국민을 보전하고, 국익을 수호하는 대적(對敵)정보의 총본산이다.
그런데 그 막강한-해야 할!-정보기관이, 김정일 사망과 로켓발사나, 핵실험도, 북의 TV발표로 눈치를 채서 국제적 망신을 샀다. 국산훈련기를 상담하러 온 인도네시아 방문단 숙소를 어설프게 뒤지다 발각돼 외교문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반면에 ‘대북 심리전단’이 국내정치에 개입해 선거 때 야당후보 비난과 대통령 치적 홍보 인터넷 댓글공작이 드러나 고발됐다. 국민을 우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젊은 층을 우군에 끌어들이라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밖에서 노리는 적에는 무지하고 내부의 우매한 국민을 상대로 정보전·심리전을 벌인… ‘정보 문외한 원세훈’과 그를 활용한 이명박 시절, 추락할 대로 추락한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민낯이다.
소국 이스라엘은 중동의 화약고에서 정보기관 ‘모사드’의 눈부신 활약에 의지해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닉슨은 정보기관을 정치에 활용했다가 패가망신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북의 적화통일 위협을 경고하며 안보를 전가의 보도처럼 즐겨 써먹는 보수정권하의 최고 정보기관이, 대북·대적 정보에는 무능하고 국민 편가르기와 야당 죽이기에만 팔을 걷어부친 현실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살라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과연 안전한가?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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