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어제 “장준하 선생은 머리 가격에 의해 숨진 뒤 추락했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이는 지난해 유족들의 의뢰로 유골을 육안 검시한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가 “가격인지 추락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과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이정빈 교수는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사건, 만삭 의사부인 사망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 굵직한 사건에 참여해온 법의학계의 최고 권위자다. 특히 그는 정밀감식을 위해 컴퓨터단층(CT) 촬영을 하고 두개골을 잘라서 그 단면을 확인하는 등 모든 과학적 방법을 동원했다. 이 정도면 의학적으로 타살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단계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제는 누가 왜 어떻게 장준하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할 단계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노력은 있었다. 2000~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가 장준하를 사찰했고, 유일한 목격자 김아무개씨가 정보기관 협력자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하지만 국정원 등 정보기관이 조사를 거부하고 주검을 검안할 수 없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장준하 선생이 뻥 뚫린 자신의 두개골로 37년 만에 진실의 문을 열었으니,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회의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그 법을 근거로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에 검시권은 물론 그동안 조사를 거부해온 국정원·기무사 등 정보기관의 자료를 조사할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면 된다.
 
문제는 이런 절차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다. 박 대통령만이 새누리당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장준하 타살 의혹에 연루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준하 선생이 숨진 다음날 내실에서,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던 보안사령관을 1시간가량 독대한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떠밀리듯 유족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넨 뒤 모든 게 마무리된 것처럼 행동했다. 지난해 8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수락 직후에는 “계속 과거 얘기만 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는 선거가 눈앞이라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규명을 통해 진정한 화해로 나아갈 길을 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박 대통령이 100% 국민대통합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장준하 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