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그 이름 알고부터

● 칼럼 2013. 5. 20. 18:48 Posted by SisaHan
오월의 뜰 안으로 불청객이 들었다. 흔히 봄에 내리는 눈을 서설(瑞雪)이라 한다지만 광풍과 우박을 동반한 눈은 내내 마음을 졸이게 했다. 이른 아침 화단가에 섰다. 눈 속에 파묻혔던 제라늄이며 새순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잠까지 설친 밤이었다. 하지만 조바심과는 달리 파릇파릇한 새순들이 싱그럽게 한들거리고 있었다. 강인함을 키우려는 자연의 섭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뜰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산 당화와 개나리는 파란 새순 속에서 배시시 꽃잎을 열었고 옥잠화, 원추리, 나리 등 구근류는 불쑥불쑥 올라와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늦추위가 더 온다고 해도 이젠 걱정할 일이 아닌 듯 했다.
뜰 안으로 번져가는 봄기운을 쫒다가 화단 귀퉁이에 놓여 있던 두 개의 빈 화분에 눈길이 갔다. 주변의 파란 꼬물거림과는 달리 새초롬한 햇살만 담겨있었다. 월동을 위해 내실로 들였다가 실패한 흔적이다. 나는 빈 화분을 보며 절정기에 있던 ‘하얀 업둥이’와 ‘빨간 별이’의 싱그럽던 자태를 그 속에 담아보았다. 실체 없는 상상은 허전함만 더 할 뿐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노지에 두었더라면 소생의 계절을 기대하련만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화초를 기르다 보면 번번이 있는 일이지만 이번은 좀 특별한 것 같다.
 
‘하얀 업둥이’와 ‘빨간 별이’는 꽃명이나 학명이 아닌 임의대로 붙여 본 이름이다. ‘하얀 업둥이’는 이름 그대로 업둥이로 들여와 개화까지 보게 되어 그렇게 붙였고, ‘빨간 별이’는 꽃의 생김새에 따라 붙여 본 것이다. 즉흥적인 작명이 꽤 마음에 들어서 빈 화분을 앞에 두고 번갈아 되 내어 보다가 화초 고유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생각날 리 없었다. 기르는 동안 몇 번 궁금해 하기는 했어도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가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면 첫 대면 부터 호구조사 하듯 궁금증을 풀어내면서 정작 애지중지하는 화초들의 이름은 무관심했으니, 놈들은 나에게서 오랫동안 꽃이 되어 줄 리 만무했다. 모든 식물들이 제 각각의 이름을 가지듯이 생장에 필요한 조건 또한 차이가 있으리라. 화초 기르기를 좋아하면서도 번번이 실패하는 연유는 아마도 이런 개별성을 간과한 탓 일 게다. 
늦은 감은 있지만 원예에 관한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신선함과 미안함이 함께한다. 과꽃을 접시꽃의 다른 이름으로 혼동했다거나 한련화는 친숙한 꽃임에도 이름을 몰랐었고, 안스리움, 디펜바키아, 싱고니움, 아레카야자, 마리안느 등은 키우면서도 몰랐던 이름들이다.
 
새로운 눈으로 거실의 화초들을 둘러본다. 포인센티아는 붉은 잎을 피우기 위해 가장 햇볕 좋은 곳으로 옮겨야겠고 아레카야자수는 큰 키를 위해 긴 화분으로 교체해야 겠다. 새로워진 눈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 뿐 아니라 사고의 폭도 확장시킨다. 안스리움은 가늘고 긴 줄기 끝에 큰 잎을 매달고 있어 안쓰러워 보이고, 싱고니움은 색상도 모양새도 특출함이 없어 싱거워 보인다. 둘 다 영어명이지만 풍기는 이미지에서 우리의 표현법과 유사한데 놀랍다. 이름을 알고 나니 화초는 그 자리인데 마음이 그 곁을 맴돌고 있다. 
봄은 생동의 계절이다. 막힌 물꼬를 터서 흐름부터 순조롭게 잡아야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