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넘어섰는데… 남북 실무회담을 위해 남쪽으로 오려는 북 한 김성혜 조평통 서기국 부장을 분계선 앞에서 맞는 정부인사.


차관급 수석대표로 ‘격하’ 맞불에… 북한 “수용 거부”

“7.4 공동성명 이래 남북한 접촉 및 회담이 모두 606회 열렸으나 이번 같은 경우는 없었다.”
한 남북관계 전문가의 지적처럼 12일 남북 당국회담의 무산은 남북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점을 재확인해줬다. 표면적으로 수석대표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둘러싼 이견이 원인이었으나, 결국 서로에 대한 불신과 비타협적인 태도가 회담 자체를 무산시켰다.
 
남북은 이날 오후 1시쯤 남북 연락관의 직접 대면 접촉을 통해 5명의 대표단 명단을 동시에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를 받아본 북한이 즉각 남한 대표단의 명단을 문제 삼았다. 남한이 건넨 수석대표가 김남식 차관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9일 실무접촉에서 대표단장을 ‘상급(장관급) 당국자’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남한이 수석대표를 차관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은 보낸 장관급과 수석대표와 급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장관급 대표라고 주장한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이 장관급인지도 의문이다. 또 정부는 서기국 국장이 장관급이라고 하더라도 이 때문에 회담 자체를 거부한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날 저녁 8시 기자회견을 연 통일부 김형석 대변인은 “북한의 주장은 상식과 국제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 북한이 그동안 유럽연합 국가들과 대화할 땐 상대국의 격에 따라 북한의 국장과 유럽국가의 과장이 만나기도 했다. 북한이 이를 격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한 사례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6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특별담화에 대해 통일부가 12일 장관급 회담을 제의하면서 12일 회담은 일찌감치 합의가 된 상태였다. 문제는 9일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불거졌다. 이 실무접촉에서 남한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수석대표가 돼야 한다는 뜻을 밝혔고, 북한이 기존 장관급 회담의 관례를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회담 명칭은 애초의 장관급 회담에서 ‘남북 당국회담’으로 바뀌었고 의제와 수석대표의 급은 서로 합의하지도 못했다. 
남북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김양건 통전부장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공공연히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상대는 김양건 통전부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 장관을 수석대표로 내보내지 않았다. 10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북한이 그동안 국장급을 수석대표로 내보냈는데 김양건 통전부장이 안 나오면 우리도 ‘급을 맞추겠다’고 말한 건 압박이라기보다는 이런 방침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로서는 걸음이 조금 꼬였다. 9일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정부가 남쪽 수석대표를 ‘남북문제를 책임지고 협의·해결할 수 있는 당국자’로 하겠다고 밝혔으나, 결국 북한의 뜻을 미리 가늠해 차관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6일 통일부가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여 ‘오는 12일 남북 장관급 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다시 제안했으나, 스스로 회담을 차관급으로 낮춘 셈이 됐다. 이에 반해 북한은 실무접촉에서 장관급(상급)을 내보내겠다고 밝혔으나, ‘내각 책임참사’라는 모자를 쓰고 나오므로 장관급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통일부의 한 전직 고위 관리는 “회담 경험이 많은 통일부가 김양건 통전부장이 수석대표로 나올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부가 청와대의 깨알 지시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강태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