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21일 저녁 서울 세종로 케이티(KT) 본사 앞에서 촛불문화제를 열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국정조사 실시와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 표명을 촉구하고 있다.


원세훈때 ‘NLL 대화록 열람 불가’ 원칙 하룻새 뒤집혀
검찰에 낸 발췌본보다 분량 늘어…의도적 짜깁기 의혹
서상기, 간사 연락 대신 보좌관 통해 1시간전 일방통보

국가정보원이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지난해 대선 개입에 이어 두번째다. 검찰 수사에서 정치관여 혐의가 드러나 국회에서 국정조사가 논의되고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음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정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여전히 진위가 모호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들고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몰랐다’거나 ‘시나리오는 없었다’고 반박하지만, 국정원이 대화록을 여당 쪽에만 무단 공개한 시점 등을 고려하면 국정원이 ‘정보 장사’를 통해 정치개입 2라운드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 대화록 무단 공개 시점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이 국회 본관 646호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새누리당) 방으로 대화록 원문과 발췌본을 들고 온 시간은 20일 오후 4시께였다. 서 위원장과 새누리당 정보위원 4명만이 1차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1시간 전인 3시7분, 서 위원장은 자신의 보좌관을 통해 민주당 정보위 간사인 정청래 의원 쪽에 “오후 4시에 대화록을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정보위는 그동안 여야 간사 사이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회의 일정 등을 잡았고, 보좌관을 통하는 사례는 없었다는 게 민주당 쪽 설명이다. 결국 ‘일방 통보’나 다름없었다는 얘기다.
정청래 의원 등 야당 정보위원들은 열람을 거부했고, 여당 의원들만 4시5분부터 40분 동안 대화록 발췌본과 원문을 대조해 가며 열람했다. 서 위원장을 비롯한 여당 정보위원 5명은 열람 직후인 4시45분께 기자회견을 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발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무단 열람과 공개가 이뤄진 이날의 오전 상황은 국정원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여야 원내대표는 6월 임시국회 안에 국정원 댓글 사건 국정조사 처리에 노력한다는 합의를 이뤄냈다. 여야가 국정원 개혁에 ‘즉각’ 착수한다는 합의도 함께 나왔다. 궁지에 몰린 남재준 국정원장이, 여론을 의식해 마지못해 국정원 국정조사에 합의한 새누리당의 열람 요청이 들어오자마자, 여야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기존 방침을 내던져버리고 대화록 무단 공개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나오는 이유다.
서상기 위원장은 국정원에 열람을 요청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서 위원장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열람을 요청하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 요청은 국정원이 대화록 원문과 발췌본을 통째로 국회로 들고 오기 불과 하루 전인 19일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지난해 원세훈 전 원장 재임 시절부터 줄곧 고수해온 ‘열람 불가’ 원칙이 불과 하루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이다.

■ 주객이 바뀐 대화 내용
국정원이 가져온 발췌본의 대화 내용도 국정원의 ‘정치적 의도’가 적극 반영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서상기 위원장은 “국정원이 가져온 발췌본은 검찰 수사 당시 제출됐던 것과는 동일본이 아닐 것이다. 확인해봐야겠지만 페이지 수가 더 늘어난 거 같다”고 했다. 엔엘엘 포기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된 정문헌 의원 등 새누리당 의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제출한 대화록 내용은 당연히 ‘수사 대상에 한정해’ 엔엘엘 관련 내용만 담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국정원이 새누리당 쪽에 열람시켜준 발췌본 내용이 검찰에 제출한 것과 다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21일 <조선일보> 등이 보도한 대화록 내용이란 것을 보면 북방한계선 내용은 일부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미국의 대북 제재나 대미 관련 인식,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대화 내용이 대부분이다. 대통령이 엔엘엘을 포기할 정도라면 그와 관련한 대화 내용이 주가 돼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국정원이 검찰 수사 뒤 자신들은 물론 현 정부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여론을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기 위해 직설화법으로 익히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대화록 이곳저곳에 편의대로 잘라내 짜맞춘 뒤 공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 김남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