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침묵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제소는 박근혜 정권의 정치보복이고, 구시대적인 매카시즘의 부활입니다.”
지난 13일 ‘김근태계’로 분류되는 민주당의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소속 의원 20명은 이렇게 밝혔다. 민평련 사무총장인 노영민 의원은 “의원들 사이에서 ‘김근태 선배가 살아계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가 나왔다. 다들 ‘틀림없이 발언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새누리당은 법적 정통성이 12·12 쿠데타로 설립된 민정당에 있고, 경제적 뿌리는 5·16 쿠데타로 설립된 공화당에 있다. 그야말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반한 쿠데타에 뿌리를 둔 것이 새누리당”이라며 “헌재에 제소당할 정당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새누리당”이라고 날을 세웠다. 통합진보당을 상대로 한 정당해산심판 청구에 반대하고 우려하는 이 상식적인 주장이 ‘민주진영의 맏형’을 자임하는 민주당에서 공개적으로 나온 것은, 정당해산심판 청구안이 5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8일 만이었다.
 
민주당도 ‘공식적인 의견’을 내긴 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의 부당함과 정치적 함의, 이것이 불러올 파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신, 유보적이고 양비론적인 ‘관전자’의 자세를 선택했다. 김관영 수석대변인은 5일 “헌정사상 초유의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 매우 유감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책임있는 역사의식에 기초한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다”고 밝혔다. 이튿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김한길 대표는 “불행한 일이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도 “통합진보당도 이번 기회에 당의 목적과 활동에 대해 국민 앞에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북한식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추구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의 종북몰이를 비판하기는커녕 통합진보당을 향해 ‘혐의 없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나마도 7일부터는 그 누구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통합진보당’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직후인 지난 9월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통합진보당 규탄 대회를 열고 있다.


진보당 정당해산심판 청구 뒤 ‘불행하고 유감스럽다’면서도
스스로 혐의 없음을 증명하라며 유보·양비론적 입장 보인 민주당

“통합진보당에 거리를 두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나 
피한다고 해서 될 문제 아니다 
통합진보당을 노린 것 같지만 결국은 민주당을 공격할 것”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금의 여권으로부터 ‘빨갱이’ 소리까지 듣는 색깔론의 피해자였던 동시에, 이 공세에 적극적으로 맞대응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또한 소속 의원들 가운데는 과거 공안사건에 연루됐던 이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왜 지금 민주당은 과감히 맞서지 못하는 것일까. 한 초선 의원은 “지도부는 물론이고 의원들도, 통합진보당과 도맷금으로 ‘종북’으로 몰리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주요 선거 때마다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이룬 탓에 유권자들은 두 당이 다를 바 없다고 여길 것이므로, 종북이라는 최악의 주홍글씨가 새겨진 통합진보당과 선을 긋지 않으면 자신들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정서가 강하다는 얘기다.
‘조중동’으로 불리는 일부 언론의 비판을 지도부가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또다른 의원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할 정도로 언론 환경은 일방적으로 민주당에 불리하다. 이 때문인지 보수언론에 욕을 먹으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당 지도부가 (종북몰이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데 있어)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당 안팎에선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민주당이 바라는 대로 매카시즘의 광풍에서 민주당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은 “통합진보당에 거리를 두면 민주당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이건 피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통합진보당을 노린 것 같지만 결국은 민주당을 공격할 것”이라며 “민주당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민평련은 기자회견에서 마르틴 니묄러의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라는 시를 읽었다. “독일에서 처음 나치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는 그들은 유대인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때도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중략) /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침묵으로는, 희망이 배제된 이 묵시록을 피해 갈 수 없다는 호소가 아닐까.
< 조혜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