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너울을 따라 가늘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길을 걷다 보니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옵니다. 밑둥부터 갈라져 있고 그나마 뻗은 줄기는 곧지 못하고 심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멀리에서는 알지 못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 보니 이 나무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부러져 나간 가지에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나무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기에 나무는 외로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 눈물들이 마를 때면 나무는 또 다른 상처와 옹이가 남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다 흘리다 그 아픔이 너무 크면 또 한번 몸을 비틀어 다른 곳으로 그 가지를 뻗어 올라갈 것입니다. 다른 나무가 아닌 이 눈물을 머금은 나무가 저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예술품보다 아름다운 나무의 상처를 어루만지다 보면 인생이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나무처럼 상처도 많고 옹이도 많지 않습니까? 그 상처와 옹이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은 밑둥이 갈라지기도 하고 이리 저리 비틀리기도 합니다. 근래에 난 상처는 아물지도 않아서인지 아직도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거룩한 바람과 성스러운 따스함이 결국 그 고인 눈물을 마르게 할 것입니다. 그의 어루만지심이 결국은 우리의 상처를 딱딱하게 옹이지게 하여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 옹이가 나의 삶을 비틀어 인생의 아름다움을 더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 입은 모모의 발걸음을 붙잡을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상처들과 옹이들이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나 저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흔적의 아름다움에 숭고함을 느낍니다.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하다가 난 생채기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난 상처와 옹이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습니다. 그의 삶은 처절하게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내려놓으며 그리스도를 따라 자발적 고난의 길을 걸었던 바울의 온몸은 성한 곳이 없습니다. 먼 발치에서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 그를 올려다 보니 그는 삶의 옹이와 상처로 옷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를 부여잡고 눈물지며 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또다시 내려놓았습니다. 그의 몸에 난 상처와 옹이는 성흔(Stigmata)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성의 거룩함이 육체에 임한 증표입니다. 상처마저도 주님을 닮아서인지 그를 바라보다가 그만 눈물이 쏟아집니다. 정말이지 그의 성흔이 눈물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 최봉규 목사 - 드림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