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두 녀석이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이따금씩 나를 슬며시 돌아보는 폼이 의심스럽다. 장난기 어린 눈웃음까지 은근하게 내비치는 터라 이 녀석들이 어떤 장난을 칠지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잠시 후 긴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녀가 깡충깡충 뛰어온다.
“할머니, 우리 Zoo에 갈 수 있어요?”
“Zoo에 가자구? 물론이지”
“할머니, Zoo… 해보세요”
“쥬? 즈으? ” 두 녀석들이 키득키득 웃는다.
“ Not joo, zoo… ”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는 나는 신경을 써서 아랫니 안면에 혀끝을 대고 “즈으”하고 맞는 발음을 내니 이번에는 저희들 기대에 어긋났는지 김빠진 얼굴이다.
손주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나의 잘못된 한국식 영어 발음을 고쳐주기 시작하였다. 면목이 안 선 나는 어느 날, 한국인들이 정확하게 내지 못하는 영어발음에 대해 왜 그런지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어 자음의 ㅂ은 영어 알파벳으로 B와 V이고, ㄹ은 R과 L이고, ㅈ은 J와 Z이고, ㅍ은 P와 F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국어에 익숙한 사람은 그 두 영어 발음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려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나를 놀려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손주들 역시 처음 태권도를 배울 때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 쩬찐이 무슨 뜻에요.“ 또 “훅찐은 무슨 뜻에요”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내는 발음만 듣고는 무슨 한국어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자 손녀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면서 쩬찐이라고 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훅찐”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전진과 후진이라는 구령이었다. 참으로 요상하지 않은가. 비록 액센트가 실리긴 했지만 어찌 이곳에서 태어난 손주들 귀에는 그런 엉뚱한 발음으로 들린단 말인가. 역시 이 땅에서 40년을 살았다 해도 겨우 네 살인 손자도 따라 하는 영어노래 가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는 나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이것이 이민 1세와 3세간에 일어나는 소통의 거리이다.
캐나다 속에 작은 한국을 심으며 살아온 이민 1세 언어는 비록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이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해도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만다. 생업에 필요한 일상 언어는 별무리 없이 통할 수 있으나 세월이 갈수록 전문용어나 깊이 있는 언어구사 능력은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이 타민족과 결혼하여 다민족가족을 이루는 상황이니 1세와 3세간 끈끈한 가족관계가 수월하지 않다. 3세인 손주들과는 언어뿐만 아니고 문화 차이도 심하여 그들과 함께 동요나 놀이도 함께 즐길 수가 없다. 사실 내 아이들을 키울 때는 낯선 풍토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이곳 문화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손주들을 보면 내 아이들을 키울 때 보고 듣지도 못한 새로운 문화를 자주 접하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 그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들 모두가 Ipad, Iphon, Ipod같은 디지털 산물이니 그들을 돌봐주는 일에도 소통이 문제될 때가 다반사다. 일방적인 손주사랑에 빠진 아날로그 세대는 숨이 가쁘고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언어만이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말 없이 눈만 바라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센스와 감정, 즉 마음의 언어가 있지 않은가. 그 사랑의 언어인 만국공용어가 있어 구태여 많은 말을 소통하지 못해도 손주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선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 내 영어를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한 사촌들에게 유치원생이던 손녀가 직접 다가가서 정확한 발음으로 다시 말해 주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나의 부정확한 영어라 할지라도 내 손녀는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었는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었다. 오늘도 내 가슴 안에 쏙 들어오는 두 녀석들과 진한 허깅으로 무지갯빛 사랑을 나눈다. “귀여운 나의 토끼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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