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 파편처럼 글자 하나하나가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말들이 있다. 얼마 전 안산 시내에서 그런 글을 봤다.
아이의 엄마 아빠가 실명으로 가로등 기둥에 매단 작은 현수막이었다. ‘지겹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자식이 어떻게 지겨울 수 있습니까?’ 이제 막 글을 배우는 사람처럼 한자 한자 읽었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엄마들이 하는 얘기의 시작은 우리 아이가 마지막에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다. 한시도 그 생각이 나지 않는 적 없다며 눈물이 차오른다.
봄소풍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오기로 한 날은 4월18일이었다. 아직도 엄마들 마음속에선 그날이 되면 아이들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4월16일이 지나가지 않는다. 4월18일이 돼야 아이들이 돌아오는데 16일에서 단 하루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100번째의 ‘4월16일’, 175번째의 ‘4월16일’이라고 날짜를 세는 이유는 그래서다. 아이가 사라진 날에서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만하나. 그러므로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세월호 지겹다’는 말은 이미 제대로 된 말이 아니다.
아이의 마지막 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은 정황 때문에 미칠 듯 괴로워하는 부모님에게 이웃의 치유자가 울면서 말했다. ‘그 고통의 순간이 짧아지길 지금 기도해 주세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관계라서 반드시 짧아질 거예요. 엄마 아빠가 한 기도니까요.’ 공감하듯 부모님도 함께 울었다고 했다.
지나간 시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다. 현실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아이의 마지막 고통과 씨름 중인 부모 자식의 관계에선 예외다. 제대로 된 특별법이 제정돼 진상이 규명된다고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모들이 거기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것은 그래야 비로소 아이와 이별할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까지 조금만 공감해 주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세계적 공익재단의 창시자가 마지막으로 구상하는 사업은 아이들에게 공감을 체득하게 하는 ‘공감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공감은 모든 소통의 시작과 끝이다. 공감이 부재한 공동체는 사막처럼 황폐화된다. 공감은 정서적 인정이다. ‘네가 맞다고 치자’ 유의 지적인 인정과는 다르다. 상처든 의견이든 마음이든 정서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람 마음을 여는 유일한 통로고 그 자체로 강력한 치유적 힘을 가지고 있어서 공감만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책을 스스로 내놓는다.
세월호 국면에서 막말과 폭식으로 축약되는 공감의 부재는 끔찍하다. 공감의 신경세포가 따로 존재한다면 그게 다 끊어진 듯 잔인하고 황량하다.
무인도에 표류한 집단의 생존율을 오래 연구한 결과, 건장한 남자들끼리의 집단보다 아기와 노인, 여자가 섞여 있는 집단의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며 ‘여기서 저 아이의 삶을 마감하게 할 수는 없다’ 다짐하며 힘을 내고, 노인과 일부 여성은 아기를 돌보며, 그들은 다시 나머지 집단이 돌보는 방식으로 생존한다는 것이다. 힘만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는 없다. 공감의 선순환만이 사람을 살린다.
투병 중인 가족을 오래 간병하다 보면 지칠 수도 있다. 그게 사람이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지겹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의 고통과 공포에 공감할 수 있어서다. 다시 다독이고 보살피게 된다. 그게 사람이다.
내 자식이, 내 동생이, 내 조카가, 내 선생님이 차가운 물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고 한번만 생각해 봐 달라. 그게 공감이다. 그러면 지겨울 수가 없다. 절대로.
< 이명수 심리기획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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