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로 시작되는 단어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이 중에 둘은 아주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하나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비굴하다는 것과 비겁하다는 것은 비슷한 의미처럼 혼용해 사용하고 있지만, 사전적 의미로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풀어본다면 비굴이라는 말은 ‘자신의 주장이나 지조를 버리고 남을 따르기 쉽다’는 의미이다. 반면 비겁하다는 말은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고 생각이 좁고 성품이 고상하지 못해 천박하며 무서워하는 마음이 많다.’를 의미한다. 우리 한국 문화는 절대 권위, 절대 아부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수직적 문화 속에서 형성된 우리들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귄위를 가진 자는 비겁하기 쉽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실력이나, 성품이 아니라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다. 자리가 주는 권위를 이용하여 아랫사람들을 누르려고 한다. 즉 비겁하게 행동한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비겁함이다.


그러나 권위를 대하는 아랫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것은 바로 비굴함이다. 권위 앞에서 아부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절대적 아부를 드러내려고 한다. 자신의 개성이나 권리까지 포기하면서 상관의 뜻에 굴복하려고 한다. 이것이 비굴함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눈치 빠른 사람, 알아서 기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능력 있는 부하는 제거 당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비겁한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왜 갑과 을의 갈등이 생겨날까? 바로 이러한 사회적 구조 때문이다. 강하게 해야 말을 듣는다는 사회구조, 아부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갑과 을은 항상 긴장과 갈등의 상황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서로 협력관계, 상호동반관계가 아니라 대적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천’이라는 말을 하나 해결책으로 제시해보았다. 이 비천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나온 말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 빌립보서 4:12에서 사용한 말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이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또 부요하게 살아도 비겁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 말은 바로 을의 위치에 있어도 기죽지 않고 또 권위의 자리, 갑의 자리에 있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비겁한 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비결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11절에서 이미 말씀하고 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에 답이 있다고 본다. 자족한다는 말은 어떠한 자리,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능력이 넘쳐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자신감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안다. 자신의 모자람을 알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겁, 비굴이라는 부끄러운 모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 모습을 본다. 자기 중심사회는 배려가 없는 사회이다.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부요한 사람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 행복의 자리가 들어갈 공간이 있을 것이다.

< 강성철 목사 -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