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권주의와 성직매매 등으로 타락의 끝을 달리던 교회에 저항하여 비텐베르크성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붙일 때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 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사태가 이렇게 까지 커질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타락한 교회에 옳은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였고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문서 또한 이곳 저곳에 나돌았기 때문에 루터는 자신이 붙인 95개 논제는 그런 것들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손을 붙잡으셨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게 하셨다. 40년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을 바로의 폭정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되었던 모세처럼 순전한 기독교를 꿈꾸던 사람들이 루터에게 몰려왔고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역사는 항상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그래서 루터는 더욱 더 하나님을 붙잡았으리라.


루터의 업적과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들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루터의 영성, 그러니까 루터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으려 했던 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의 관심 밖이다. 루터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theology of the cross)이라 명명하는 것 처럼 루터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spirituality of the cross)이라 부른다. 사도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복음에 대한 외침은 루터의 심금을 울렸고 그 믿음의 관문이자 종착역인 십자가는 루터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종국에는 하나님께 가게하는 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루터의 기도는 십자가 앞에 선 죄인을 발견하는 것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제자 중 하나가 루터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 왔을 떄 루터는 주저함 없이 “십계명과 주기도문으로 기도의 꽃다발을 만들라”고 하였다. 환언하면 루터의 말은 십계명의 계명과 계명을 헤아리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주기도문의 한구절 한구절을 살피며 자신의 심령과 삶을 돌아보라는 것이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된 모습으로 서 있고자 했던 루터! 그는 자신의 죄성을 바라보면 볼 수록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높아 갔다. 기도 가운데에서도 루터는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간청만 하다가 눈을 뜨기 보다는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 서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기에 몸부림 쳤다. 혹자는 ‘이미 벗은 죄성만 바라보던 루터는 힘들고 가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십자가가 아닌 부활을 그리고 자신의 죄성이 아닌 해방된 삶을 바라보았다면 더욱 행복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된 자신을 십자가 앞에 끊임 없이 세워 본 사람은 루터가 얼마나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살았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 것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 없고 죄성에 대한 자각 없이는 해방된 삶도 없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게 썩어가는 교회개혁의 기치아래 선봉장이 되었던 루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부여잡고 그 험악한 세월을 버텨 낸 것 처럼, 루터는 십자가를 부여 잡고 외로운 싸움을 감격스럽게 감당해 낸 것이 아닐까?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고난주간에 갑자기 떠오른 종교개혁가 루터에 대한 단상이다.

< 최봉규 목사 - 토론토 드림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