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2일 기어코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를 국정으로 전환한다는 행정예고를 했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2017년 1학기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하겠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국정 교과서를 실현하겠다는 정권 차원의 의지가 읽힌다. 역사 해석을 국가가 독점하는 국정체제의 세계적 후진성과 질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도의 준비기간도 무시한 채, 정권의 욕망에 맞춰 국가 백년대계를 흔들겠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날 낸 자료에서 발행체제 전환의 첫 번째 이유를 “역사교과서 검정제 도입 이후 헌법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인식을 기르는 데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런 헛소리가 또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가족사를 위한 교과서’ 만들 것인가
누누이 지적돼 왔듯이 국정 역사교과서는 이제 지구촌에서 희미한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가는 독재•전체주의의 폐습이다. 북한을 비롯한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다양한 교과서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유엔의 권고이기도 하다. 역사 왜곡에 혈안이 돼 온갖 수단으로 교과서에 개입하려 드는 일본의 극우정권조차도 국정화라는 ‘마지노선’은 넘지 않고 있다. 국정체제 전환은 집권세력이 특정 역사관을 국민에게 강제로 주입해도 괜찮다는 ‘불건전한 국가관’, 즉 독재를 정당화하는 국가관을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이것이 집권자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박 대통령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반민주적이고 부도덕한 행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 한풀이를 위해 유신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를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는 의구심이 세간에 가득하다. 이게 사실이라면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가족사를 위한 국정 교과서’가 탄생하는 셈이다.

교육부도 교과서 검정제의 취지가 ‘다양성’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집필진이 다양하게 구성되지 못하는 바람에 그 다양성이 퇴색했고, 그래서 국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양성 훼손을 바로잡기 위해 단일한 국정 교과서를 만들겠다니, 초등학생도 놀라 쓰러질 논리의 모순이다. 교육부가 말하는 집필진의 편향성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정 그렇게 판단한다면 다양한 검정 교과서가 나오도록 정책을 펴면 될 일이다. 한 나라의 교육부가 이런 창피한 궤변을 버젓이 발표 자료에 수록하는 걸 보면 얼마나 논리가 궁색한지 알 법하다. 또 ‘국정 교과서’라는 용어를 애써 피해 가며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명명한 데서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국정화 논란은 ‘역사전쟁’이니 ‘이념대결’이니 하는 말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과 논리에 근거한 역사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힘으로써 민주국가의 상식을 파괴하고, 후진국을 자처함으로써 국격을 망가뜨리는 폭거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니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각 분야의 학자, 교사, 대학생, 학부모 등이 모두 나서 국정화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 와중에 국정화에 찬동하는 교수, 교사, 언론인 등이 있다니 과연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실적으로도 2017년에 국정 역사교과서를 학교 현장에 적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교육부는 11월에 집필진을 구성해 1년 만에 집필 작업을 끝내겠다고 한다. 완전히 새로운 교과서를 쓰려면 3년도 빠듯하다는 전문가들 의견에 비춰보면 턱도 없는 일정이다. 또 집필이 끝난 뒤 겨우 한 달 안에 심의•수정을 마친다고 한다. 교육부 자체 정책연구 자료에서도 심의·수정 기간으로 11개월을 잡고 있다. 교육부 일정은 교과서를 날림으로 만들겠다는 공언이나 마찬가지다.
정부는 학계에서 권위와 전문성을 인정받는 교과서 집필진을 구성하겠다고 하지만, 역사학계와 교사들이 일제히 반발하는 상황에서 어떤 권위자•전문가가 집필에 참여할지 의문이다. 집필진의 다양성을 갖추는 건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뉴라이트 등 극우적 시각과 사실 오류로 범벅이 된 허접한 교과서가 나올 공산이 크다.


교육현장 혼란 부를 ‘1년짜리 교과서’
교육 현장의 반발과 혼란은 불 보듯 뻔하다. 시·도 교육감들 사이에서는 벌써 대안 교과서나 보조 교재 개발 등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역사 교사들도 이미 불복종 운동을 선언한 바 있다. 야당은 국정화 금지 법제화를 공언하고 나섰다. 정권이 바뀌면 검정제로 되돌리라는 여론에 다시 맞닥뜨릴 테고, 워낙 상식과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국정체제를 다음 정권이 계속 유지하기도 힘들 것이다. 결국 ‘1년짜리 교과서’에 그치리라는 지적도 틀린 말이 아니다.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한국사가 필수과목이 되는 만큼 국정·검정을 오락가락하는 것은 입시의 불안 요인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명분과 실리에서 잃을 것밖에 없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이토록 집착하는 정권의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지난 2년 반 동안 이렇다 할 성과 하나 내지 못한 정권이 스스로 강조해온 다른 국정 현안을 모두 팽개친 채 쓸데없는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정권의 무능을 이념몰이로 덮으려는 속셈이라면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니다. 짧은 안목으로 국격을 갉아먹고 교육을 혼란에 빠뜨린 교과서 국정화야말로 박근혜 정권의 실정 가운데서도 단연 백미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