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꽃은 이렇게 지랄스럽게 피어나지” 하면서 울먹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위로할 길이 없어 당신이 살면 얼마나 살 거라고, 몇 번이나 봄을 더 맞을 거라고, 그냥 오늘을 즐기라고, 나에게인지 친구에게인지 모를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만물이 새롭게 피어나는 봄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가까운 사람을 봄에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뒤 맞는 봄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끔찍하다. 생의 환희에 들떠 있었을 어린 생명을 잃은 사람에겐 봄은 더 잔인하다. 대학에 막 입학한 해 봄 캠퍼스는 눈 돌릴 곳도 없이 온갖 꽃을 그야말로 지랄스럽게 피워댔다. 꽃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 봄 내가 사랑한 사람 하나가 저세상으로 갔다. 새파란 청춘이었다. 사고였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봤다.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관을 확립하는 데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는 대통령의 극찬 이후 공영방송이 자사 드라마를 기다렸다는 듯 홍보하고 있다. 잘생긴 육군 대위가 청와대와 연결된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국가, 뭐 아무렇게 대하면 어때. 이렇게 내뱉고는 납치된 애인을 혼자서 구하러 간다. 며칠 전 읽은 세월호의 기록이 오버랩되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은 방대한 재판 기록과 증언 등 모든 사실을 토대로 시간대별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세 장에서 반복되는 결론이었다. 모든 상황이 구할 수 있었던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런 염병 해경이 뭔 소용이여. 눈앞에 사람이 가라앉는디. 일단 막 갖다대서 살리고 보는 게 이상적이제. 지시 들었다가는 다 죽이는디.” 세월호에 이물을 무조건 들이대고 승객들을 잡아 내려 20여명을 구한 어선의 선장이 내뱉은 말이다.
육군 대위의 말과 선장의 말은 동의어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3월21일이었고, 나는 그 뒤에 보았다. 애국심 고취와 국가관에 나쁜 영향을 주는 드라마라고 했어야 마땅했다. 의사와 군인을 극한상황에 놓고, 작가 말대로 판타지 러브스토리를 펼치고 있는데, 애국심과 연결시킨 것은 모든 사안을 애국심으로 연결시키고 싶은 대통령의 애국심 판타지의 발로이다.
남산예술센터에서 본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박근형 작·연출)도 국가란 무엇인가, 군인의 의무와 국민의 의무는 무엇인가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2015년의 대한민국 탈영병, 1945년의 일본 오키나와에서 가미카제를 지원한 조선인, 2004년 이라크에서 미군에 식품을 납품하던 업체의 한국 직원, 2010년 백령도 인근의 초계함 선원들…. 시공간은 다르지만 죽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국가를 믿고 따르는 모든 국민의 전쟁터와 같은 삶으로 이입된다. 군인이 아니라 ‘모든 국민은 불쌍하다’고 말한다.
이 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활약한 화가 변월룡의 전시회를 보면서도 디아스포라의 74년 생애와 작품에 마음이 저렸다. 원정출산으로 태어나 어떤 때는 미국인으로 어떤 때는 한국인으로 행세하지 않는 이상,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듯 국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국민은 국가를 버리지 않았는데 국가가 국민을 버린다면… 국민은 디아스포라, 난민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태양의 후예>가 판타지 러브스토리여서 그렇지 현실이라면 애인을 구하러 간 대위는 실패하고, 용케 살아남는다 해도 국가가 명령불복종으로 당연히 버릴 것이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손에 죽는 무기상인의 운명과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김정헌 선생의 전시회에서 본 작품의 제목이 마음에 남는다. <희망도 슬프다>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그 아래 시커먼 바다와 거기에 떠 있는 노란색 창문 하나…. 희망이 있는 듯 있는 듯 실은 없는데 그것에 기대는 것이 슬프다.
희망도 슬프지만 망각이 슬프다. 잊으라 잊으라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슬픔들을 간직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 봄날을 보낸다.
< 김선주 -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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