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압승하리라던 20대 총선이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 놀라운 이변의 배후에는 20대 청년 세대가 있었다. 이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가 정치지형을 바꾸어놓았다.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많은 지역에서 야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려 13%나 치솟은 20대의 높은 투표율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이 움직이면 정치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청년들은 온몸으로 체험했다. 20대 총선이 우리 사회에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청년들이 맛본 정치적 승리의 경험은 장기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체질을 강화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층’으로 불리던 20대가 대거 투표소로 달려간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마저 포기해야 하는 처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삶의 벼랑에 몰린 자가 보내는 절박한 구조 요청이다.
20대의 ‘선거반란’은 젊은 세대의 정치적 자각을 알리는 신호탄인가? 아직 희망적 전망을 내놓기엔 이르다. 청년 세대의 절망적 분노가 곧장 정치적 각성이나 조직적 행동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청년 세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공론장인 대학이 완전히 탈정치화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 대학은 줄곧 민주화의 선봉장이었다. 4·19, 5·18, 6·10으로 이어지는 민주혁명의 구심점은 언제나 대학이었고,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에 유일한 정치적 공론장 구실을 한 것도 대학이었다.
이런 대학이 정작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급격히 탈정치화되었다.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고,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다. 대학의 탈정치화야말로 민주화의 최대 역설이다. 독재가 민주주의자를 길러낸 반면, 민주화가 민주주의자 양성을 중단시킨 것이다. 민주화 시대에 대학에선 민주적 의식을 가지고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며, 정치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자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어떻게 이런 기이한 일이 생겨난 것일까.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투쟁한 사람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것”이라는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과거 운동권이 보인 권위주의적 행태와 권력 지향적 처신이 대중들의 지탄을 받기 시작하면서 대학에서도 ‘정치’, ‘지식인’, ‘운동권’이라는 말이 졸지에 ‘욕’이나 ‘낙인’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노골화된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대학을 일개 기업으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 대학은 정치의 무풍지대로 퇴락해버린 것이다.
독일 대학에 갈 때마다, 대학식당에 뿌려진 수많은 전단지를 볼 때마다, 한국 대학의 현실이 겹쳐 보여 가슴 아팠다. 난민, 핵발전소, 기본소득, 최저임금, 극우주의, 유럽통합, 전쟁, 테러 등 현안 문제들이나, 자본주의 종언, 에너지 전환, 생명 윤리 등 거시적인 이론적 문제들까지 실로 다양한 정치적 주제들을 놓고 학생들이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취업정보와 기업홍보 전단으로 도배질된 한국 대학의 모습이 떠올라 울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헬조선’의 현실은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역사의 질서다. 우리가 만든 질서이기에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 질서를 지배하는 자들의 거짓과 폭력과 야만과 파렴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무능과 무위와 무력과 무관심이 더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무릇 모든 해방은 자기해방이다. 청년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자는 바로 청년 자신밖에 없다. 그리고 청년 세대는 자신을 해방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번 총선에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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