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박정희의 성장 신화는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총선에서 여당이 크게 패배한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다. 사실 박정희의 신화는 문민정부 이후 경제가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을 때, 민주적 절차가 소모적이라고 느낄 때마다 국민들의 기억의 창고에서 불려나왔다. 건설회사 사장 출신 이명박이나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 모두 그 신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과연 ‘기적’의 역사는 반복되었는가? 이 두 정권을 거치는 동안 한국은 저성장, 양극화와 소득 불평등, 노인 빈곤, 청년 실업이 만성화된 국가가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과 자원외교에 수십조원을 날렸다. 지난 8년을 거치면서 1천조원 이상의 가계부채와 700조원이 넘는 국가채무가 쌓였다. 박근혜 정권 3년 동안의 국가채무는 노무현 정부 5년의 9배에 달한다. 박근혜 정권은 개성공단 폐쇄로 수많은 중소기업가들과 그곳에 고용된 사람들을 파산과 빈곤으로 몰아넣었으며 500만 자영업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원래 박정희의 지도력이라는 ‘신화’도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백번 양보해서 60~70년대 성장에서 박정희의 공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민주화·다원화된 지금 세상에 대통령이 군 지휘관 방식으로 국가경제를 이끌 수 있다는 것도 난센스다. 21세기 지구화 시대에,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가 조립가공의 단계를 넘어선 단계에, 대기업 밀어주기 성장전략이 먹힐 수도 없고, 1인당 소득을 국가발전의 지표로 삼는 것도 촌스러운 이야기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를 마치 주문처럼 외면서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도 재벌 대기업 편향적 정책을 폈다. 지난 3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공개 일정 468회 중, 기업가들을 16번 만날 동안 노동계 대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이 정권의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노동개혁’ 법안 등을 보면 사회를 망가뜨리고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고, 국가가 대기업의 민원 해결사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대선 당시 공약집의 16%를 차지하던 ‘복지’라는 용어는 당선 직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경제 활성화’가 경제민주화 자리를 대신했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최악의 산재 국가이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가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 상황에서 ‘경제발전’과 ‘국민행복’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권 3년 동안 우리가 기억할 만한 복지·노동·교육 정책은 전혀 없었고, 실체가 모호한 ‘창조경제’가 미래지향적인 산업정책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저출산 고령화의 대처, 지식 경제를 위한 사회정책 마련은 국가의 미래와 관련된 것이며, 타이밍을 놓치면 국가를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는 사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구시대의 막내’라고 토로했던 시점에 한국은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복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국가의 목표와 전략을 완전히 새롭게 세웠어야 했고, 복지를 위한 조세 개혁과 미래지향적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혁신과 노동시장 정책을 세웠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대선 당시 공약했던 경제민주화나 복지라도 차분하게 추진했더라면 경제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아마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 등으로 초래된 국민들의 국가불신을 치유하는 데도 국가채무 이상의 갈등해결 비용이 소모될지 모른다.


‘탄핵’에 버금가는 박근혜 정권 총선 패배는 이제 국민들도 성장 신화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 ‘성장’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늦기는 했지만 복지, 조세 개혁, 경제민주화, 교육 혁신 논의를 다시 시작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북방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두 야당은 20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모든 경제사회 관련 법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정권교체, 대권 운운하지 말고 새 국가 패러다임을 각각 제시하고서 경쟁해야 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