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그랜드 벨리 통신 1

● 칼럼 2016. 4. 30. 19:49 Posted by SisaHan

쨍그랑 쨍그랑. 텃밭 일구는 쇠스랑 소리가 섣부른 봄을 재촉하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햇볕이 좋다며 잠깐 해 바라기 한다던 그이가 앞선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연장을 챙겨 뒤뜰로 향한지 며칠 만에 제법 틀을 갖춘 텃밭이 되어간다. 아마도 지루한 겨울동안 수없이 그려 둔 밑그림 효과이지 싶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나도 덩달아 미완성인 텃밭을 곁눈질 하며 고이 모셔둔 야채 봉지들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나름대로 자리 배치시키느라 열을 올린다.


텃밭의 지존인 상추와 쑥갓은 맨 앞자리에다 뿌리고, 쓰임새가 다양한 부추는 가능한 한 넓게 터를 잡아야겠다. 키 큰 깻잎 군단은 뒷자리로 돌리고 얼갈이배추와 열무도 두어 두둑 뿌려야지. 가장 햇볕 좋은 곳은 당연히 청양고추 몫이고 넝쿨쟁이 더덕도 탐은 나는데 손바닥 만한 저 텃밭이 다 받아 주기나 할까,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새파란 채소 잎이 나풀거리는 옆집 텃밭에서 시선이 멈췄다. 큼직한 케일에다 가녀린 팬지꽃까지, 며칠 째 모녀가 그이의 훈수를 받아가며 어쭙잖은 삽질을 하더니 어느 사이 모종까지 이식해 놓은 것이다.
씨 뿌리기도 망설여지는 시기에 봄 채비를 끝낸 이웃집을 보며 그들의 바람대로 더 이상 그런 날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상처투성이 숲을 건너다본다.
우리 가족은 그랜드 리버(Grand river) 강물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그랜드 벨리(Grand valley) 라는 소도시에 터전을 잡은지 네 계절 째다. 이곳은 ‘그랜드’라는 거대한 수식어가 붙은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 그리고 시냇물보다 규모가 조금 큰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이름이 주는 뉘앙스와 딴판인 마을길을 오갈 때마다 어느 작명가의 가장된 표현이라 여겼는데 겨울 꽁무니에서 그에 걸맞은 광경을 목도했다.


‘강물이 일어섰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포개진 거대한 얼음덩이가 솟구치거나 강변에 쌓여진 광경을 보며 번뜩 들어온 생각이다. 언제나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이 어느 날 갑자기 폭도처럼 일어나 남하하고 있는 광경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했던 강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후폭풍 격인 얼음비(freezing rain)는 온 마을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연 이틀 얼음비가 내리더니 온 동네를 얼음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마을이며 숲이 얼음에 깔려 낮게 엎드린 광경은 소설 ‘더 로드’(The road) 에서 묘사한 지구의 종말을 연상하게 했다. 뒤이어 단전, 단수,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사이렌 소리가 온종일 끊이질 않았음은 물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얼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뿌리째 뽑히거나 찢어져 주민들의 재산에 막대한 손상을 입혔다.


토론토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100 km 남짓 떨어진 곳인데 상상 외의 모습으로 돌변한 자연 현상은 그 나름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붙여졌음직한 그랜드 리버, 그랜드 벨리는 결코 가장된 작명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직도 그날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가슴 아프게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는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더 단단히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음을 인지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봄이 성큼 왔으면 좋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