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젊은 친구들과 만난 자리의 끝 무렵, 한 친구가 기타를 치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노래했던 탓일 게다.
총선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쿠바와 40년 만에 국교를 재개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퇴임 전에 북핵과 관련해 무엇인가를 타결하려 하지 않을까. 오바마가 5월 말 일본의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해 참배한다는데 그게 올바른 일인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취임 초 남북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후퇴했고 힐러리, 트럼프, 샌더스 중 누가 실질적으로 남북관계 호전에 도움이 될까. 달랑 소녀상 하나 세워놓고 그것조차 지키기 어려운데 진작에 위안부 기념공원이라도 지어서 일본 총리 아베가 참배하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 이야기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았던 일행은 모든 의문과 걱정을 뒤로한 채 친구를 따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를 목청껏 불렀다.
젊은 친구들이라지만 모두 50을 막 넘은 나이들이다. 직장에선 앞자리에 나서서 현장 중심의 일을 하기 어려워졌고, 가정에선 20대에 접어든 자녀들과 왜 소통이 안되는지,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각자 인생에서 잃었던 것과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길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회한 비슷한 것에 휩싸여 있었다. 누구나 나이 들면 안 한 일, 안 갔던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일상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혀놓고 살았기 때문일 거다.
간밤의 여운이 남았는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가슴 밑바닥에서 과거의 숱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밖에 내놓은 화분이 비를 흠뻑 맞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이 생명의 환희에 몸을 떠는 듯 여겨지고, 담 너머로 보이는 이름 모를 나무의 연한 가지들에 달린 작은 이파리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봄비를 자신의 몸뚱이 전부를 바쳐 받아들이는 것처럼 힘차고 기쁜 듯 보였다.
문득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껴야 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죽음을 숙고할 게 아니라 삶을 숙고해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올랐다. 죽음과 죽음 저편의 신과 종교… 그보다는 현재의 내 삶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 봄비 속의 나무들을 보면서 환하게 또렷해졌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하나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남긴 스피노자. 그가 한 말이 아니라 그 뒤에 마르틴 루터가 일기에 쓴 것이라고도 하지만, 죽음보다 삶 쪽에 무게를 두었던 ‘철학계의 그리스도’로 불린 스피노자가 충분히 했을 말이기도 하다.
어제저녁 한 친구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독했다고 했다. 1600년대에 살았던, 종교계로부터 배척당했던 그의 철학이 왜 21세기에 힘을 갖는가를 설명해주었다.
책장 구석에서 스피노자를 꺼낸다.
…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이 분노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크다. 진정한 사랑과 소유욕은 별개이다. 소유욕은 자기애일 뿐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 용서한다는 것….
기뻤던 일보다는 분노했던 기억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행복했던 순간보다 괴로웠던 일들이 현재를 발목잡을 뿐 아니라 그것에 따른 욕망이 일상을 추동하기 쉬운 우리들의 삶.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했던 일이 언제였던가. 살아 있음에 전율과 기쁨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그런 후회들이 몰려온다.
사람은 죽음 저 너머 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삶의 행동양식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선한 것, 아름다운 것, 행복 사랑 기쁨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 오는 창밖을 온종일 내다보며 잃어버린 것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해본다. 내 인생에서의 마지막 사과나무는 무엇일까. 봄비 속에 하염없는 생각에 깊이 침잠한 하루, 이런 하루, 나쁘지 않다. 자연이 신이라고 한 스피노자, 봄비는 자연, 신인 듯하다.
< 김선주 -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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