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 504조원의 1%인 5조원만 고용 창출 투자에 사용해도 비정규직 50만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지난해 8월에 나온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장이다. 당시 정의당도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의 1% 투자로 청년 일자리 20만개 창출’을 내세웠다. 이후 야당들과 그 지지자들은 일자리와 비정규직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재벌의 사내 유보금 투자를 해법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ㅈ신문 한 논설위원은 ‘부두교 주술 같은 야당의 일자리 처방’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런 주장이 ‘과학적 처방과 거리가 먼 엉터리 경제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사내 유보금은 공장과 기계 설비, 재고, 지식재산권 등에 이미 들어가 있어 현금성 자산은 전체 유보금의 17% 정도에 불과한데다, 그마저 임직원 급여 지급과 원자재 구입, 하도급 결제, 인수·합병(M&A) 자금, 불확실성에 대비한 비상금 등의 용도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들의 현금성 자산 보유 비중은 선진국 기업들의 40~60% 수준이어서 걸핏하면 자금난에 빠져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대기업들이 줄을 잇는데도 사내 유보금이 많다고 시비하는 것은 기업이 망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는 게 김 논설위원의 주장이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뤄주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념이나 가치의 문제를 떠나 사실관계만 분명히 해주면, 즉 요즘 언론계 일각에서 유행하는 ‘팩트 체크’만 이뤄져도 독자들은 나름 판단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어떤 관련 기사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언론은 평소 정치혐오를 비판하면서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풀뿌리 없는 정당을 비판한다. 그러나 정치부 기자들은 모두 정치인들의 뒤만 쫓아다니기에 바쁘다.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자극적인 한마디를 끌어내 갈등을 빚는 세력이나 사람들과 싸움을 붙이는 게 정치 저널리즘의 기본이 되고 말았다. 선거 때만 되면 ‘민심 탐방’ 기사를 제법 싣지만, 그마저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이유를 들어보는 수준에 그친다. 왜 풀뿌리 민주주의가 안 되는가? 정당들은 풀뿌리의 당내 유입과 참여를 원하는가? 그들은 사실상 풀뿌리의 유입을 방해하는 공작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공작의 수법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걸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 아니면 풀뿌리 민주주의는 영원히 실현되기 어려운 환상이므로 그걸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상을 근거로 해대는 정치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나는 이런 문제를 다룬 기사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언론은 각자의 당파성에 근거해 반대 정당이 압승을 거두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겁을 주는 캠페인성 기사를 양산해내거나 각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의 유불리나 이해득실을 분석하는 일에만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가 그런 기사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건 언론은 ‘싸움과 당파성을 판매하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걸 자인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이 두가지 사례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언론의 소통 문제다. 소통 불능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 역시 그렇다. 반대편과 소통은 포기한 채 ‘마이 웨이’로만 치닫고 있으며, 공통분모 발굴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불온한 중도’로 보는 이념 편향성에 빠져 있다. 언론은 ‘당장 여기서’라는 목전의 사태에만 집착하느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공간적인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신문의 죽음’이 거론되는 상황은 이전에 지켜온 문법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으론 돌파할 수 없다.
모든 언론이 지난 총선 결과에 정녕 경악했다면,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상식과 관행을 의심해보는 발상의 전환은 왜 할 수 없단 말인가?
< 강준만 - 전북대 교수, 신문방송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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