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갑내기 친구를 잃었다. 그녀는 투병생활을 시작한지 1년6개월 만에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비록 시한부 삶이긴 했지만 그리 빨리 가버릴 줄 몰랐기에 아직도 가슴 한 켠에서 싸한 바람이 인다. 떠나기 한 달 전쯤에도 그녀는 전혀 환자 같지 않았다. 넉넉한 미소와 우아한 모습으로 일상의 정담을 나눴기에 더욱 믿기지 않는다. 아직도 살아서보다 더 자주 마음에 밟히고 있는 그녀. 아마도 만날 기회가 또 있을 줄 알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안 나눈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서 그런가 보다.
미치 알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에서 ‘살아서의 장례식 (living funeral)’을 만났다. 모리 교수는 매사추세츠의 브랜다이스 대학의 심리학 교수였다. 그는 희귀병인 루게릭병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아간다. 그가 애제자 미치 알봄을 다시 만나며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바로 모리 교수가 경험한 인생의 의미를 강의한 것이다. 학생은 미치 알봄, 단 한 사람. 그러나 미치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펴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책으로 남긴다. 모리 교수는 자신의 장례식을 정작 주인공인 자신이 볼 수 없기에,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인생길에서 만난 소중했던 사람들과 의미 깊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살아서의 장례식’을 연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 쌓여 자신에 관한 시(詩)도 듣고, 재미있는 추억보따리도 풀어 놓으며, 웃고 우는 감격의 시간을 즐긴다. 정작 그가 떠났을 때는 가족끼리만의 조용한 장례를 치른다.
우리 어느 누구도 자신의 떠나는 시점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시한부 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상태로 어렴풋이 예감할 수는 있나 보다. 토론토에서 내과전문의로 유명했던 고 이재락 박사도 별세하기 5개월 전에 ‘생의 잔치(Celebration of Life)’를 열었다. 어쩜 의사이기에 대강 자신의 떠날 시점을 가늠하지 않았나 싶다. 그날 거의 300여명이 넘는 지인들이 초대를 받았다.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절대로 칙칙한 검정색 옷을 입지 말고 꽃무늬 있는 화려한 옷을 입으라고 요청했었다. 말 그대로 ‘생의 잔치’라는 의미였다. 아름다운 작별은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공식적인 이별잔치로 이뤄졌다. 그날의 분위기는 엄숙하거나 슬픔에 잠기지 않았고, 마치 여행길을 전송 나온 것 같이 술렁였다. 사회자의 격 있는 재담, 이 박사에 관한 시 낭송, 세 아들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이야기, 친구의 추억, 고인의 담담한 작별 인사… 등등으로 조용한 잔칫집 분위기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큰 아들이 기타연주로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My Way’였다. 울고 싶은 심정을 참아내던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셔줬던 것이다. <My Way>는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내 방식대로 아무 후회 없이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대로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기에 아직도 그 노래의 여운으로 이 박사가 남아있다. 그는 ‘생의 잔치’를 통해 이 세상에서 맺은 모든 인연들에게 마지막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공식적으로 작별을 고한, 진정 사려깊고 용기 있는 분이었다.
이렇게 친지들과 함께 ‘생의 잔치’를 열었던 이재락 박사,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마지막 강의’의 주인공 랜디 포시 교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 모두 시한부 삶을 살았던 보통사람들이 아니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며, 각자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진하게 남긴 특별한 사람들이다. “고통 없는 경건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고 많은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라는 조엘 드 로스네 MIT교수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며칠 전, 떠난 친구가 생전에 애지중지 아끼며 가꿨던 아름다운 꽃밭과 가지런한 텃밭을 둘러보았다. 방긋이 봉오리를 열은 각종 꽃들이 그녀의 미소로 반기며 손까지 흔드는 것 같았다. 집 안팎에는 온통 그녀가 남긴 삶의 열매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일깨웠다. 생(生)의 길이보다 어떻게 충만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함을.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미치 알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에서 ‘살아서의 장례식 (living funeral)’을 만났다. 모리 교수는 매사추세츠의 브랜다이스 대학의 심리학 교수였다. 그는 희귀병인 루게릭병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아간다. 그가 애제자 미치 알봄을 다시 만나며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바로 모리 교수가 경험한 인생의 의미를 강의한 것이다. 학생은 미치 알봄, 단 한 사람. 그러나 미치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 강의 내용을 책으로 펴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책으로 남긴다. 모리 교수는 자신의 장례식을 정작 주인공인 자신이 볼 수 없기에,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인생길에서 만난 소중했던 사람들과 의미 깊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살아서의 장례식’을 연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 쌓여 자신에 관한 시(詩)도 듣고, 재미있는 추억보따리도 풀어 놓으며, 웃고 우는 감격의 시간을 즐긴다. 정작 그가 떠났을 때는 가족끼리만의 조용한 장례를 치른다.
우리 어느 누구도 자신의 떠나는 시점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시한부 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상태로 어렴풋이 예감할 수는 있나 보다. 토론토에서 내과전문의로 유명했던 고 이재락 박사도 별세하기 5개월 전에 ‘생의 잔치(Celebration of Life)’를 열었다. 어쩜 의사이기에 대강 자신의 떠날 시점을 가늠하지 않았나 싶다. 그날 거의 300여명이 넘는 지인들이 초대를 받았다.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절대로 칙칙한 검정색 옷을 입지 말고 꽃무늬 있는 화려한 옷을 입으라고 요청했었다. 말 그대로 ‘생의 잔치’라는 의미였다. 아름다운 작별은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공식적인 이별잔치로 이뤄졌다. 그날의 분위기는 엄숙하거나 슬픔에 잠기지 않았고, 마치 여행길을 전송 나온 것 같이 술렁였다. 사회자의 격 있는 재담, 이 박사에 관한 시 낭송, 세 아들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이야기, 친구의 추억, 고인의 담담한 작별 인사… 등등으로 조용한 잔칫집 분위기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큰 아들이 기타연주로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My Way’였다. 울고 싶은 심정을 참아내던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셔줬던 것이다. <My Way>는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내 방식대로 아무 후회 없이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대로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기에 아직도 그 노래의 여운으로 이 박사가 남아있다. 그는 ‘생의 잔치’를 통해 이 세상에서 맺은 모든 인연들에게 마지막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공식적으로 작별을 고한, 진정 사려깊고 용기 있는 분이었다.
이렇게 친지들과 함께 ‘생의 잔치’를 열었던 이재락 박사,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마지막 강의’의 주인공 랜디 포시 교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 모두 시한부 삶을 살았던 보통사람들이 아니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며, 각자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진하게 남긴 특별한 사람들이다. “고통 없는 경건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고 많은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라는 조엘 드 로스네 MIT교수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며칠 전, 떠난 친구가 생전에 애지중지 아끼며 가꿨던 아름다운 꽃밭과 가지런한 텃밭을 둘러보았다. 방긋이 봉오리를 열은 각종 꽃들이 그녀의 미소로 반기며 손까지 흔드는 것 같았다. 집 안팎에는 온통 그녀가 남긴 삶의 열매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일깨웠다. 생(生)의 길이보다 어떻게 충만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함을.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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