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병우 민정수석을 둘러싼 대한민국의 풍경이 점입가경이다.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이다. 수사 대상이 되자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정상 직무수행 할 수 없다고 사퇴했는데 같은 수사대상인 우 수석은 또 버티기로 일관한다. 버티기와 물타기란 신종 막장 드라마 소재들이 국민을 아주 짜증나게 한다. 우 수석은 왜 사퇴하지 않는지 자신이 직접 해명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마이크를 안 잡고 있다. 이 문제 제기됐을 때 1시간씩 격정 토로하던 우 수석은 어떻게 됐나. 너무 정치 노회한 물타기다. 이 뒤에 누가 있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야당 원내대표가 발언한 내용이다. 막장 드라마 수준이고 물타기와 버티기라는 지적과 국민이 짜증난다는 표현은 참 잘 들어맞는 것 같다, 하지만 “뒤에 누가 있는지 답답할 노릇”이라는 마무리는 진짜 답답한 말이다. 영화 ‘내부자들’이 예시를 했는데도, 정말 누가 있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는 그 나름 명분이 있고, 정의감이 흐르고, 재미에 감동도 있었다. 하지만 ’우병우 수석 구하기‘라는 청와대 드라마는 도대체가 명분도, 실리도 없을뿐더러 감동은 커녕 눈덩이처럼 커지는 의혹과 암투와 고집과 공작이 난무해 흉하기 짝이 없는 삼류 저질인 드라마일 것 같다.
뭔가 비리의혹이 제기됐으면 깨끗하게 소명해 떳떳이 흑백을 밝히고, 과오가 있으면 사과하거나 사퇴하면 간단했을 일이다. 그런데 이 무슨 오기와 해코지란 말인가. 폭로한 언론사와 특별감찰관에게 뒤집어 씌우는 역습으로 초점을 흐리는 ‘물타기’와 ‘뭉개기’의 정치공작 악습이 재등장했다. 자신들의 손으로 검증해서 세운 감찰관에게 올가미를 씌우려하는 것도 우습지만, 지금껏 누이좋고 매부 좋은 사이이던 보수신문과 돌연 각을 세우며 치부를 들춰내 부패언론으로 추락시킨 밀월깨기 반전도 볼만하다. 의혹의 대상으로 수사를 받는 자가 수사 지휘선상에 버티고 앉아있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오직 권력자와 그 치마끝을 붙들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의 성역 지키기를 위해 여러 술수를 동원하는 모양새나, 대기업과 검은 유착을 즐기며 권력부침에 편승해 위세를 부려 온 거대신문, 양쪽 다 도덕성과 개념의 수준에서 도토리 키재기나 다름없을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지저분한 막장 대결이요 국민이나 국익은 전혀 안중에 없다.
그러니 국민은 피곤에 지치고 국정은 표류한다. 민생이 아우성인 경제난국에다 미국은 금리를 올리겠다는 예고까지 발하는데, 방만한 추경예산 하나로 땜질하며 생색내려 용을 쓴다. 사드문제로 갈등이 격화되어 가는데, 오불관언 밀어붙이기 일변도다. 북한이 잠수함 미사일까지 쏘며 극으로 내달리자 뗑깡부리는 아이 흉내 내듯 여당은 핵잠수함을 만들겠다고 비핵의 금단마저 넘나든다. 미·일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외교가 방향을 잃고 휘청댄지는 오래다. 끝이 안보인다. ‘레임덕’이 이렇게 빨리 오고, 식물정부를 자초하는 무개념 철학부재의 정도가 이렇게 심할 줄이야. 찜찜한 이 세력은 그동안 ‘둘러메치기’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남북정상 대화록 폭로를 비롯해, 대선의 댓글부대 수사, 국정원 직원 셀프감금 등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초원복집 사건이 그랬고, 총리 밀가루 사건 등 역사도 깊다. 전통을 자랑하는 반전술을 이번에도 재빨리 꺼내들었다. ‘개 돼지’ 민중들이 어서 잊어먹기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런 역습과 반전의 결과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본말전도요 엉터리였음이 밝혀진 것이 어디 한 둘인가. 당장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고 정의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이들이 오히려 눈총을 받으며 고생을 하지만, 세월이 지나 무죄 혹은 혐의없음으로 원점에 되돌아오곤 한다. 이미 망가진 뒤여서 분통만을 삭일 수도 있으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역사가 기록하여 진실은 살아남는 법이다.
양치기의 외침은 반복할 때마다 곧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아무리 버텨도 해는 기울고 세월은 간다, 바람 빠지는 풍선은 붙잡고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다. 권력의 종점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게 지는 해의 그림자 뒤에 추한 모습을 감추려 급급할 일이 아니다. 국민의 부름을 받은 공직자가 ‘멸사봉공’(滅私奉公)은 커녕 개인의 안위에 급급하여 ‘멸공봉사’(滅公奉私)에 눈이 멀어서야 말이 되는가. 이순신의 사즉생(死卽生)을 새길 일이다. 대통령이나 우병우나, 그 힘센 권력과 명석한 두뇌를 개인의 보신과 정권의 성역방어에 쓸 게 아니라 어서 속히 고통 중에 있는 국민과 나라 앞에 승복하는 것이 그나마 개인적으로나 정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모든 면에서 다행일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럼] 잇단 경주 지진, 안전지대라 생각말라 (0) | 2016.09.29 |
---|---|
[칼럼] 뭐가 두려워 ‘최순실 스캔들’ 증인채택 막나 (0) | 2016.09.29 |
[1500자 칼럼] 한국 여자배구와 리우올림픽, 그리고 그 이후 (0) | 2016.09.08 |
[칼럼] 국공합작이라고? (0) | 2016.09.08 |
[한마당] 말기적 ‘전조현상’ (0) | 2016.08.30 |
[칼럼] 일본왕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0) | 2016.08.30 |
[1500자 칼럼] 헌신하는 자들 (0) | 2016.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