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북의 도발을 원하는가

● 칼럼 2016. 10. 18. 19:01 Posted by SisaHan

북한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정치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주요 사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핵심 변수다.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인, 그중에서도 대통령의 대북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 인식과 대응 방식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때로는 위험하다. 지난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대한민국으로 오라”고 노골적으로 탈북을 부추긴 데 이어 어제는 “결국 북한은 자멸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의중을 가감 없이 드러낸 셈이다.


박 대통령이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건 북한이 핵실험을 계속하는 등 대화보다는 대결 자세로 나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왜 죽기 살기로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지부터 정확히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은 미국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가 만나 합의한 2005년의 ‘9·19 공동성명’에 이런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게 9·19 성명의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북핵 진실’을 외면하고,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 남한을 위협한다는 일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북핵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물론 북한의 핵무기가 우리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현실적으로 핵 폐기 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심각한 단계에 와 있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가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엉뚱한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최근 사드 배치 결정을 둘러싸고 ‘미국을 겨냥하는 북한 핵무기를 막기 위해 왜 남한에 사드를 배치해 국내 갈등을 야기하고, 동북아의 안정을 해치느냐’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북한 붕괴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북한 붕괴론은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돼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만 해도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사실상 북핵 문제를 방치하면서 붕괴를 기다렸다면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북한의 붕괴를 부추기고 있다. 북한을 무너뜨려야 할 정권으로 상정하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모양새다.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의 반발을 불러오면서 남북 사이의 대치 국면이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서로 ‘말폭탄’만 주고받고 있지만 그 강도가 심해지면 언젠가는 실제 폭탄이 오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다.
이런 호전적인 대북관은 국내 정치를 옥죈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도 큰 문제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국론 통일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입 다물고 있으라는 얘기다. 이승만 정권 이후 수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다. 하지만 북한과 극한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이런 목소리가 일정 정도 먹혀드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휴전선이나 서해안에서 국지적인 군사 충돌이 일어나면 모든 현안이 다 덮이게 돼 있다. 박 대통령이 식상할 법도 한 북한 위협론을 계속해 강조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박근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극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둔 김영삼 정부 말기에 벌어졌던 이른바 ‘북풍 사건’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최경환 국민의당 의원이 엊그제 공개한 예비역 장성의 문자메시지는 이런 우려를 깊게 한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대통령의 다음 수순은 북한이 한미연합군에 의한 보복 빌미를 줄 수 있는 도발을 해오도록 계속 자극할 것”이라는 예비역 장성의 전망은 섬뜩하다. 정권 유지를 위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 것이라는 분석인데 박 대통령의 대북관이 아무리 호전적이라도 제발 그런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