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대학에 임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중국인 교수임용후보자와 저녁 식사가 있었다. 대학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협상의 자리였다. 5명의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식사 도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캐나다 수도에 위치한 대학에서 교수를 뽑는 자리에, 정작 캐나다인은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한 명은 미국인, 필자는 한국인, 임용결정권을 가진 연구소장은 오스트리아, 후보자는 중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동아시아 국가에서 외국인 교수를 보는 일도 이제 어렵지 않다. 중국은 엄청난 자본을 무기로 선진국의 외국인 교수를 유혹 중이고, 3년 연속 노벨상에 빛나는 일본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외국인들이 찾아가는 나라다. 한국도 2002년부터 외국인 전임교원을 늘리려는 자구책으로 브레인 풀 제도를 도입했고, 꾸준히 외국인 전임교원을 확보해 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그 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참담한 일이다. 서울대를 떠나는 외국인 교수들에 대한 인터뷰가 신문을 도배 중이고, 외국인 전임교원의 수는 3년 연속 하락 중이다. 한국 대학은 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전시행정의 결과란 참혹하다. 취지는 좋았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평가에 외국인 교원의 가중치를 높였다. 대학들은 그 제도를 역이용했다. 무늬만 외국인인 한국계 교수들이 무더기로 임용되었다. 실제로 브레인 풀 제도 아래서 채용된 외국인 교수 중 한국계 외국인은 40%를 웃돈다.
이런 작태를 주도한 대학이 서울대라는 사실도 분개할 일이다. 그보다 앞서 서울대는 학문적 근친교배의 비참한 현실부터 혁신해야 할 것 같다. 서울대 출신 교수의 비율이 85%가 넘는 대학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교류란 불가능하다. 그런 위계로 가득한 곳에선, 절대로 자유로운 사상이 움틀 수 없다.
2016년, <네이처>에 한국파스퇴르연구소장 하킴 자바라의 글이 실렸다. 인터뷰는 폐부를 찌른다. 한국의 연구 환경이란,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논문을 내”기 어렵고, “유치원을 함께 나왔으니 너를 지원해줄게”라는 농담이 여전히 유효하며, 심지어 영어로 쓴 연구비 계획서를 받아주지도 않는 곳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가라는 경계는 사라졌다. 실리콘밸리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주류가 되었고, 미국은 H1B라는 비자로 이들을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페이스북과 구글과 애플이 삼성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15년을 허비한 한국 교수들에게, 외국인이란 금발의 서양인이었을 게다. 검은 머리로 외국에 나가 박사학위를 받은 자신도 실은 외국인었음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이 가르쳐 박사로 만든, 이주 노동자들과 같은 국가 출신의 제자들에게 절대 서울대 교수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미 과학기술 대학원 진학은 회피의 대상이 되었고, 비대해진 대학원은 동남아 유학생들로 채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머릿속에 외국인 교수란 파란 눈의 외국인이다. 21세기의 한국은 20세기 중반 유학을 떠났던 미국과 닮아가고 있는데,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조선에 가 있다.
눈을 떠 현실을 보자. 한국은 이미 다문화 국가다. 이 다문화 시대에, 가장 개방적이어야 할 학문에서조차, 우리는 외국인을 차별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한 논문을 내고 졸업한 이주 노동자의 아이에게, 우리는 어떤 동지애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는 외국인인가? 질문해봐야 한다.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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