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학교를 갓 나와 임관한 초임장교는 군인정신이 철철 넘쳐난다. 그에게 적당히란 말은 통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자세부터가 거의 부동이다. 그런데 중위, 대위가 되면 여유가 생기고 요령이 늘어 능글 맞아진다. 적당히 타협도 하고 자세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좋게 얘기하면 군대생활에 이력이 붙으면서 잘 적응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훈련소를 막 나온 신병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행동에 절도가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밥그릇수가 불어나고 후임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내 ‘나사’가 풀리고 군기도 흐물흐물 해진다. 그게 산전수전 다 겪어 제대를 앞둔 군대 말년이 되면 언제 신병훈련소를 다녀왔는지, ‘올챙이’ 시절은 까마득히 잊고는 ‘올챙이’들을 부리고 괴롭히며 손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시법연수원을 나와 재조 법관으로 임용된 초임 판·검사들도 처음의 근무태도나 정신상태는 훈련소를 막 나온 군인들과 다를 바가 없이 소명의식이 뚜렷하다. 배우고 익힌대로 법전에 충실한 재판을 하고 변호사나 사건 관계인을 만나는 것도 무서무서 꺼려한다. 그런데 한해 두해 해가 가면 세상 돌아가는 인정사정도 감안하게 되고, 정치인들의 입발린 감언이설에도 은근슬쩍 넘어가 주곤 한다.
어디 군인이나 법관들 뿐인가. 크고 작은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도, 동호인이나 봉사단체에 발을 디딘 회원이나 임원도, 헌신과 봉사의 직분을 수여받은 공직과 성직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항상 그 자세와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일하며 섬기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렵다.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 사이도 갈라서는 변심이 비일비재할 진대, 이기주의의 경쟁터인 세상에선 오죽하랴. 그 것은 사람들의 놀라운 현실 적응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감각이 무뎌지는 반복의 효과이기도 하며, 어쩌면 철학과 소신의 부재에도 기인할 것이다.
신학교를 갓 나온 전도사들, 목사안수를 받으며 성직의 반열에 오르는 기쁨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에 감격하며 눈물 흘리던 목회자들도, 영혼구원의 막중한 사명에 내 한몸 바쳐 가시밭길 마다않으리 다졌던 초심은 현실 앞에 차츰 멀어져 간다. 비포장 오솔길 보다 이왕이면 번화한 융단 길을 찾게 되고, 길 잃은 한 마리 가엾은 양 보다는 주위를 맴도는 살찌고 윤기 흐르는 양떼들에게 더 애착이 간다. 고되고 가난한 산골 목자로 남기보다 배부르고 안락한 큰 물에서 추앙받는 목사님으로 변해가는 것을 자신의 성장과 부흥·발전으로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헌법을 지키며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일념으로 헌신하겠다고 국민 앞에 선서했던 대통령 가운데 그 약속을 초지일관(初志一貫)한 인물을 몇이나 찾아 볼 수 있는가. 취임 때의 초심을 잃지않은 그 분이야말로 위인이고 나라의 영웅이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남을 터이지만…. 언제 약속했느냐는 듯 공약을 내팽개치고, 짐이 언제 국민을 위하며 섬기겠다고 표를 구걸했느냐는 태도로 군림하며 찍어 누르고 귀 막아 외면하고 제멋대로인, 아예 정반대의 길을 가는 막무가내 변신 대통령이 버젓이, 오히려 큰소리를 쳐서 국민들을 심한 스트레스로 내모는 실정이 아니던가.
“원래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고 죄인들이며 간사하다”는, 사람들 스스로의 낯뜨거운 자기 평가가 말해주듯 인간본성에서 ‘처음과 끝이 같다’는 ‘시종여일’(始終如一)의 DNA는 처음부터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변심과 변신이 자연스런 인간습성으로 나타는 것이고 그걸 스스로 합리화하느라 지혜롭게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사자성어도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르겠다.
변화와 변신, 좋은 일이다. 그것이 진·선·미(眞·善·美)로의 바뀜이라면 백번 천번 환영할 일이다.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워지고 더 진실해지고 선하고 의로워지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많은 이웃과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 대부분은 거짓과 사악함과 추한 모습들로, 그 것이 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높이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를 쓰고 바뀌어 가는 게 세상사요 인간사가 되고 있지 않은가.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전혀 변치않고 초심을 지키는 이는 아마도 전무후무 유일하게 예수님 뿐일 것 같다. 하지만 또 한 분이 계시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세상의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이 아닐까. 자식이 미워도 고와도, 어릴 때도 장성한 어른이어도, 반항하며 딴 길로 달아나 속을 썩였어도, 그저 내 자식 사랑은 처음이나 끝이나 변하는 어머니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면서 왜 어머니의 ‘처음처럼’은 배우고 익혀서 깊이 새겨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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