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빨리 변하는 스피드 시대에 살아갑니다. 맘 먹고 새 것을 장만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뒤진 것이 됩니다. 제품사들은 새 상품으로 소비자들을 계속 유혹합니다. 과속하는 세상 속에서 따라잡다가 우리는 지쳐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이야기가 회자되며, 옛 노래도 가끔 흥얼거리는 그 틈으로 세시봉의 인기가 치솟은 듯합니다. 저들의 인기는 40-50대들의 반영입니다. 어느 분과 대화 중에 초기 한국교회에 대하여 듣고 귀가 솔깃한 것을 보고 제 나이를 셈해 봅니다.  서점에서 홍성사의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를 구해 읽었습니다. 저자의 집필 동기가 오늘 한국교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입니다. 오늘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며 이대로 가다간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저자는 오늘을 보면서 내일의 달려갈 길을 과거를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현주소는 스피드에 변종된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대로는 안됨을 알면서 휘몰아 치는 대형 쓰나미에 밀리다가 망가짐을 경험합니다.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문명에 뒤진 한국인을 무시했다가 회개하던 하디 선교사, 그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합니다. 꽃다운 나이에 풍토병으로 목숨을 잃고 사소한 병을 제 때 치료하지 못해 어린 자녀들을 땅에 묻는 저들의 눈물의 이야기들… 호주의 데이비드는 부산 선교의 절박함을 듣고 한국에 옵니다. 서울에서 5개월 동안 언어와 문화를 익힌 후, 벅찬 가슴을 안고 20일 여정으로 부산에 당도합니다. 도착한 데이비드는 고열을 앓고, 그 다음 날 숨을 거둡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호주에 전해졌을 때, 호주의 성도들은 “왜 그렇게 무모한, 무의미한 선교를 강행하여 젊은 생명을 잃게 했느냐”는 질타와 비난보다, 데이비드의 생명과 뜻을 이루자며 100여명의 선교사들을 더 부산으로 보냅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주어진 현상과 결과만으로 답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 정신은 결과의 잣대로 갈기갈기 찢기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초기 교인들의 신앙은 성숙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며 그대로 삽니다. 주 안에서 모두 한 형제와 자매라는 말씀 앞에서 부리던 노예를 자유케 하며, 첩을 돌려 보내고, 빚진 자들을 탕감시켜 주는 훈훈한 일들을 통해서 한국 선교는 100년도 안 되어 선교 25%라는 경이로움을 이룹니다. 한국교회는 더 높은 목표(50%)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목표는 있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결과는 정신 뒤에 오는 법, 하지만 정신없이 결과만 쫓다가 50%도, 25%도 아닌 20%로 추락해 버렸습니다. 북미의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한없이 달리다가 말을 멈추고 내려 가끔 뒤를 돌아 봅니다. 한참 돌아 보다가 다시 말을 타고 달립니다. 혹시 영혼이 몸을 뒤따라 오지 못할까 봐, 그리고 영혼을 데리고 떠납니다.

앞으로 질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소유하며 가는 것입니다. 옛 정신과 마음으로 새로운 내일을 향할 수는 없을까? 지난 주(14일, 21일에도 말씀을 전함), 최호순 목사님(수원성화교회)이 오셔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있고 제게 없는 것은 옛 사람이 보여준 열정과 정신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갈릴리 어부를 통해서 세계를 보시던 주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서 세계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옛 사람처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오로지 한 마음을 보였던 어르신들의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1세대와 2세, 3세대의 영적 브릿지로 서 있습니다. 톡톡 튀는 젊음과 꿈, 그리고 오로지 한 마음을 가진 어르신들, 그것을 조화시키며 역사를 펼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에 미친 그 한 사람이 되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함께 바라보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최선순 목사 - 믿음 휄로쉽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