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도 감옥 안에서 텔레비전 등으로 바깥세상 소식을 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최근 쟁점으로 떠오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비용 문제를 접한 심정은 어떨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깜짝 놀라고 당황했을까, 아니면 ‘내가 대통령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문제없이 해결할 텐데’라고 생각할까. 그도 저도 아닐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사드는 이미 관심 영역 밖이고,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본격적으로 시작된 재판에서 어떻게 하면 죄를 모면할까에만 골몰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드 조기 배치는 박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남긴 최악의 선물이다. 어느 면에서는 뇌물죄나 직권남용 등의 혐의보다 더 심각하다. 당장 미국 쪽이 1조원이 넘는 사드 비용 청구서를 들이밀면서 한-미 간에 미묘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사드 비용을 직접 지불하지 않아도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의 보복조처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적 피해가 산사태처럼 밀려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봉 신세로 전락한 한국의 처량한 자화상을 지켜보면서 국민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아무런 책임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감옥에 파묻혀 있으니 복장이 터질 일이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전략, 무책임은 하늘을 찌르지만 보수 정치권과 보수 언론 등 응원군의 역할도 이에 못지않다. 사드 배치는 나라와 겨레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안보 저해 세력’에 불과했다. “국민의 안보 불감증”을 개탄하면서, “국민은 눈앞의 이익에 빠져 안보를 내팽개치는 행위를 당장 멈추라”고 호통쳤다. 사드가 한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일체의 의문 제기는 “김정은만 이롭게 하는 행위”로 매도됐다.
미국이 사드 비용 청구서를 들이미는 상황에서도 보수 진영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주한미군 철수 등 한-미 동맹이 급속히 와해될 수 있는 만큼 좌파 정부 탄생을 우려해서 한 발언”이라는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 <조선일보>는 “새 정부는 이것(사드 비용)이 협상의 정치이슈로 증폭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최악으로는 워싱턴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등장할지 모른다”고 경계했다. 미국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새 정부가 사드 비용 문제로 크게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는 충고인 셈이다.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반발에는 “주권 사항”임을 줄기차게 내세웠으나,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미국의 안하무인적 태도에는 최대의 동맹관계라는 현실론 속에서 몸을 사리는 모양새다.
새 정부는 도리없이 전임 정부가 저질러놓은 사고 수습을 위해 미국·중국 등과 힘겨운 밀고 당기기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다. 모두 만만찮은 상대다. 트럼프는 “고도의 전략으로 계산된 행동을 하는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비유된다. 시진핑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호랑이”라는 말을 듣는다. 북한 역시 녹록지 않다. “거칠고 끈질긴 협상가”(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라는 평이 있듯이 스라소니 새끼쯤은 된다. 그러면 남한은 무엇인가? 보수 진영은 말로는 새 정부의 치밀한 계산과 영민한 대처를 주문하며 “여우의 지혜”를 입에 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이 묶인 순한 양을 만들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탁월한 협상력은 거친 반격(파이트백), 협상의 판을 뒤흔드는 지렛대(레버리지), 예측하기 힘든 통 큰 사고(싱크 빅) 등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있다.(안세영의 <도널드 트럼프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우리 정부는 모든 면에서 원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새 정부의 협상력을 정권 출범 전부터 깎아내리고 있다. 유력한 대선 후보의 안보관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념을 의심한다. 혹시 새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거친 반격’이나 ‘싱크 빅’으로 맞서면 곧바로 ‘종북’이라고 비판할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 대미감정 악화는 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높이는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는데도 보수 진영은 그것마저도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협상이며 안보며 경제적 손실방어고 간에 모두 물 건너간다. 보수는 이미 안보를 망칠 만큼 충분히 망쳤다. 안보는 결코 보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보수가 죽어야 안보가 사는 현실이다.
< 김종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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