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철부지 수박

● 칼럼 2011. 9. 3. 18:11 Posted by SisaHan
뒷마당에서 수박을 처음 발견한 날, 나는 손끝이 떨릴 만큼 흥분되었다. 커다란 수박을 한없이 축소해놓은 것 같은 초록 알갱이를 들여다보는 순간, 모든 생명들이 함께 숨을 죽이는 듯했다. 시장에 있는 것으로만 알던 수박을, 올 봄에 그저 호기심으로 뒷마당 텃밭에 심었던 것인데 초록 결실까지 보게 된 것이다. 위로 자라던 줄기가 바닥으로 내려가 덩굴손을 내밀어 풀잎을 끌어안으며 씩씩하게 벋어갔다. 별을 닮은 노란 꽃들이 군데군데 피더니 밤톨만한 수박을 달고 있던 게 불과 열흘 전이었다. 엊그제는 주먹만해졌다며 사진까지 찍었었는데 그새 수박 알갱이가 몇 개 더 생겼다. 수박을 처음 심어봐서 그런지 사슴 뿔을 닮은 이파리를 들춰볼 때마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엿보듯 짜릿했고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었다. 절기에 맞춰 햇볕 냄새를 품은 정직한 수박으로 자란다면 무얼 더 바랄까 싶었다.
 
언젠가 여름도 물러갈 무렵 철 지난 수박 한 통을 사왔었다. 옅은 초록색 항아리에 행서로 붓글씨를 써 내려간 듯한 모양새가 꼭 한국 수박 같았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던 모양과 맛이 글로벌 시대를 맞아 획일화, 동질화되는지 한국 수박과 서양 수박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들뜬 마음에 반으로 갈라놓자 웬걸, 수박은 연분홍빛 속살과 듬성듬성 생기다 만 것 같은 하얀 씨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수박을 고를 때 남편과 내가 서로 몇 번씩 번갈아 두드려보며 기분 좋은 ‘탱탱’ 소리를 듣고 장담하며 사온 것이었다. 식구수가 적은 우리에게는 부피가 큰 과일을 잘못 만날 때처럼 심란한 일도 없기 때문에 수박을 고를 때 여간 긴장하는 게 아니다. 새까만 씨에 단물이 줄줄 흐르는 빨간 속살을 기대했는데 이럴 수가. 남편과 아들은 어느새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익다가 만 것 같은 색에서 어찌 그리 단맛이 나느냐였다. “맛만 있으면 되지 색깔이 무슨 상관이냐”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철을 모르는 수박을 내놓으려고 사람까지 철이 없어졌는지 인위적인 단맛이 첨가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요즈음은 제철 과일이나 제철 음식이라는 명칭이 어색할 만큼 먹을 거리에 계절 구분이 없다. 아무 때나 만나게 되는 과일과 채소로 계절에 따른 단어 연상도 혼란스럽다. 냉이나 취나물로 봄을, 사과와 붉은 감으로 가을을 연상하던 일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음력 날짜로 절기를 가늠하던 시절,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참는 법을 배웠다. 계절이 분명하던 때라 수박을 먹기 위해 여름을 기다려야 했고 떡국이 먹고 싶어 설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릴 필요 없이 즉석에서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 계절의 맛을 모르는 현대인의 식생활은 삶에 뭔가 하나쯤 빠진 듯 허전하다. 여름도 덥지 않고 겨울도 맵지 않은 인위적인 생활에 인성마저 변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칼바람 부는 마당에서 빨갛게 언 손으로 김장을 담그면서도 겨울을 호령할 줄 알았고, 연탄을 들여놓고 흐뭇해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요즈음엔 사철음식이 되어버린 김치나 동치미도 그렇게 겨울에나 만나던 음식이었다. 
채소나 과일은 흙과 물과 태양과 바람이 사람의 정성과 화합하여 빚은 초록의 결실이고 받은 만큼 정직한 보답을 할 줄 아는 생명체들이다. 아마 그때 만났던 수박에는 어떤 요소가 하나쯤 부족했으리라. 눈 앞의 편함과 이익을 따르기 보다는 권태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여유, 조급해 하지 않고 때가 차기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 먹이사슬을 인정하는 자세가 있어야 자연과의 유대를 맺을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야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건강하다. 이글거리던 한여름의 태양 볕을 터질 듯 가득 안고 있어 칼 끝만 살짝 들이대도 쩍 갈라지며 빨간 세상을 열어주던 수박으로 여름을 식히던 그때가 그립다. 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해진다더니 제법 꼴을 갖춰가는 텃밭의 수박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는 작은 행복을 맛본다.  

<김영수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