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으로 바깥출입도 못하고 종일 집에만 갇혀있다가 하루는 유튜브(YouTube) 동영상에 “놀라운! 이것은 당신이 죽기 전에 볼 필요가 있는 비디오입니다”는 광고가 눈에 띄기에 죽기 전에 봐야 한다는 말에 속아 얼른 그 프로그램을 찾았다.
내용은 큰 수영장 몇 배가 되는 원탁 우리 안에 고래를 여러 마리 집어넣고 재주를 부리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관중은 모두 합하여 1만명은 될까? 고래가 고래답지 않은 행동, 이를테면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물을 뿌리는 행동을 보이면 관중들은 재미있다 박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고래는 묘기를 어디서 배웠을까? 물론 사람에게 배웠다. 고래의 묘기는 생존을 걸고 행동과학에서 나온 훈련법칙을 따라 단계별로 하나하나 훈련해서 조합한 것이라고 해야겠다.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코끼리를 예로 들어보자. 두꺼운 철판 위에 코끼리를 가두고 그 철판에 점점 더 뜨거운 열을 가한다. 그리고 동시에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을 들려준다. 그 철판의 뜨거움이 견디기 어려운 정도가 되면 코끼리가 잠시나마 다리를 서로 바꾸어가며 들었다 놨다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코끼리가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다. 이때 뜨거운 열기는 파브로브가 말하는 무조건 자극, 교향곡은 뜨거운 열과 항상 같이 나타나는 조건자극이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 하다 보면 뜨거운 열이 없어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만 나오면 코끼리는 비록 철판 위가 아니라도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할것이다. 사람 편에서 보면 음악에 춤추는 코끼리이다.
동물의 묘기는 전부 이와 같은 전기쇼크, 먹이같은 동물이 본래 고통스러워하거나 좋아하는 먹이같은 무조건 자극으로 훈련된다. 파브로브와 이론적 근거는 다르지마는 벌써 오래 전에 스키너(B.F.Skiner)라는 심리학자는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도 강화 인자(reinforcer)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 강화 인자를 이용하여 탁구를 치는 비둘기, 노래하는 개(犬)도 만들었다. 그러니 동물들의 묘기란 그들이 이 묘기를 배울 때 신체적인 고통이나 먹이를 박탈당한 경험을 수 없이 겪었다 할 수 있다. 이 고통을 피하거나 먹이를 얻으려는 행동에 관중은 박수를 보낸다.
나는 동물들의 묘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면 인간이 퍽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동물에게 사람보다 더 잔혹한 것이 있겠는가. 동물은 그들이 태어난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이떤 사람은 호랑이를 길들여 고양이처럼 안고, 사자를 길들여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주인 앞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호랑이나 사자들은 그들이 뛰어다니던 초원과 구릉이 그립고 주인 TV에 마음껏 뛰어다니는 자기 동료들을 보면 몹시 부러운 생각이 들 것 같다.
벌써 20년이 지났다. 서울에 살 때 어느 여류시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음식점 옆으로는 교실 반 만한 크기의 울타리 속에 사슴 한 마리를 넣어두었다. 아마 손님들이 자연의 풍광을 상상하며 식사를 하라는 음식점 주인의 장사술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 여류시인은 나를 보며 “선생님 저 사슴 눈 좀 보세요. 얼마나 예쁜지…”라는 감탄사를 연발해대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이 시인(詩人)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이 사슴의 눈에 보이는 것은 슬픔 그것 뿐인 것 같았다. 자기가 뛰놀던 광활한 푸른 초원에 대한 그리움에 젖은 슬픈 두 눈 뿐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자유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구속이 올 때는 무조건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반항한다. 어린 아이들이 밥을 먹을 때 보면 외부에서 누가 먹여주는 것 보다 제 스스로 먹으려고 발버둥친다. 우리가 옛날 미국 원조를 받으면서도 미국 욕을 하던 것도 자유를 잃지않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번 박근혜를 몰아 낼 때도 독재의 사슬에 자유를 잃었다는 생각,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독재의 사술(邪術)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추운 2016년 겨울에 그 넓은 광화문 거리를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촛불들로 훈훈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새로 당선된 대통령을 만나면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유튜브에서 여러 번 보았다. 왜 그럴까? 내 생각으로는 쌓이고 쌓인 한(恨)이 순간적으로 눈물로 폭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날의 환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환경을 마련해 줄 것 같은 사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시집이라고 가서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문득 친정 아버지를 만나면 왈칵 울음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짐승은 그 짐승이 사는 곳에서, 사람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가고 싶은 데를 가고, 아무 구속이나 제약이라곤 없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이동렬 - 웨스턴 온타리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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