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개념의 광대 윤도현

● 칼럼 2017. 10. 2. 16:42 Posted by SisaHan

2시간에 걸친 열띤 공연의 피날레는 ‘흰수염고래’였다. 널리 알려진 곡이지만, 다시 자막으로 소개되는 곡의 내력에 뭉클한 반향이 가슴마다에 번져 일순 숙연해진다.
『 흰수염고래는 바다에서 가장 큰 동물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플랑크톤 등을 먹으며 작은 동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우리도 흰수염고래처럼 권력과 힘이 있어도 이를 함부로 쓰지않고 작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아가는 사회에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잔잔하게 시작된 노래가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3천에 가까운 청중의 뜨거운 호응이 감동적이다. 하나가 된 듯 율동과 합창이 어우러진 야광봉의 군무가 대형 공연장인 소니센터를 가득 채운다.


「 어쩌면 그 험한 길에 지칠지 몰라/ 걸어도 걸어도 더딘 발걸음에/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 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더 상처 받지마 이젠 울지마 웃어봐…」
록음악에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록밴드의 대부분은 하이톤에 격정적인 리듬과 엄청난 볼륨 등이 연상될 뿐 거기에 이른바 ‘한국적 개념’이 담겨있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귀가 멍멍한 폭발적 음량과 현란하고 어지러운 동작에 그치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강한 메시지가 있어서 아름다운 공연, 그리고 탁월한 보컬과 청중이 하나가 된 모처럼의 장쾌한 무대였던 것 같다.


 ‘오 필승 코리아’의 윤도현 밴드가 그렇게 토론토에 ‘흰수염고래’의 여운을 남기고 갔다. ‘개념있는’ 록그룹답게 YB밴드 그들은 캐나다 처음인 이번 공연에서 ‘한류’의 한 축인 힘있는 록밴드의 역량으로 한인동포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새로운 시대와 새 삶에의 희망을 주는 위로의 무대를 펼쳤다. 지난 적폐 정권 ‘무개념’ 권력자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핍박받으며 저항과 비주류의 이미지로 민초들의 사랑을 받은 록커 윤도현이었기에, 이민사회를 찾아와 동포들에게 안겨준 그의 용기와 위로의 메시지가 더욱 실감나고 값지게 와 닿았으리라.
최근 국정원 적폐청산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고급 정보기관이 아니라 추잡한 정치공작에 몰두했던 이명박-박근혜 정권하 권력기관의 저질스런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철저히 ‘자유영혼’들이어야 할 문화 예술인들을 친정부·반정부로 구별하고 차별해서, 입을 막고 무릎을 꿇리고 일터를 빼앗아 ‘영혼없는 무뇌 기예인(無腦 技藝人)’들로 만드는 공작을 폈다. 문화 예술에 사회비평과 진취적 개혁의 모색이 녹아있지 않다면 맹물이나 다름없다. 권력에 순응하고 찬양 일변도인 문화와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노래를 하든 춤을 추든, 무슨 문예활동이든 현실에 대한 성찰과 비판적 대안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활동이 곧 문화요 예술이라고 볼 때 그런 철학과 ‘개념’이 없는 이들이라면 그저 글자그대로 ‘꼭두각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예인의 조상은 우리 역사에 자취를 남긴 ‘광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연희(演戱)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천민 취급은 받았어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춤추고 노래하고 줄타기를 했던 것이 아니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시대 광대들의 ‘개념있는’ 삶이 묘사된다. “징헌 놈의 이 세상 한판 놀다 가면 그 뿐이다”라고 인생을 질펀한 놀이판으로 여기지만, “왕을 가지고 노는 거야! 개나 소나 입만 열면 왕 얘긴데, 좀 노는 게 뭐가 대수야?” 라며 당대의 폭군 연산과 그의 애첩 장녹수를 신랄히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인다. 힘 있는 양반들의 꼭두각시나 노리개에 그치기를 거부하고, 잘못된 세상을 면박하는 진정한 광대의 모습이다. 극중 광대 공길은 단식한다고 분노한 연산군의 면전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논어에 이르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는데,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창고에 곡식이 가득한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나이까?” 결국 그는 예상대로 몰매를 당하지만.


러시아에도 ‘블라디미르 레이니도비치 두로프’라는 광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도 당시 황제 빌헬름 2세를 풍자했다가 감옥에 갇혔어도 “우리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하지만 결코 왕의 어릿광대는 아니다. 우리는 지고한 대중의 어릿광대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독일의 유명한 광대 칼 활렌틴은 독재자 히틀러의 관저 공연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고, 미국의 매카시 선풍 와중에 빨갱이로 낙인 찍혀 추방된 찰리 채플린이 끝내 권력과의 타협을 거절하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고수한 것은 모두 용기 있는 ‘개념’의 결단이며 고고한 광대정신의 사표라고 할 것이다.
다시는 광대들의 놀이판에 권력이 재를 뿌려선 안된다. 광대들은 자유영혼으로 ‘개념의 끼’를 맘껏 발산해야 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