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스페인 독감은 5천만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그 후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계의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다양한 주장을 펼치면서 관련된 담론에 개입하고 있다. 대부분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때로 논쟁을 불러오기도 한다.
한 예로 세계적 이론가 지제크는 <한겨레> 칼럼(2020년 4월13일치)에서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세계를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는 영국 총리가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철도의 일시적 국유화를 발표한 사례를 든다. 다른 매체에서 그는 이스라엘 총리가 코로나19와 관련해 팔레스타인을 적극 지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제안한 두 가지 대책, 즉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의료체계 개선과 자원 생산 및 공유를 위한 국제 공조체계 구축은 전적으로 동의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사례로 보면 세계가 바뀔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사실 영국 총리는 사태 초기에 신속한 대규모 검사 대신 인구 60%의 감염을 감수하는 집단면역이라는 전체주의적 전략을 선호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돕는 것은 ‘악어의 눈물’처럼 보인다. 그의 비판자들이 제기한 것처럼, 코로나19 이후 자본주의는 더 강력한 모습을 띨 수 있고, 시민들은 국가의 통제에 더 순응하게 될 수 있다.
전염병으로 세계사가 바뀐 사례들이 있긴 하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에 의한 인구 감소는 농업노동력 부족으로 봉건제의 해체를 가져왔고, 17세기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창궐하여 명 왕조가 붕괴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1918년 스페인 독감은 5천만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그 후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요소들로 치밀하게 조직되어, 그 내적 모순들을 심화시킬지라도 당면한 위기를 해소해왔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 해소는 언제나 인종과 계급(빈곤)에 근거한 차별적 희생을 전제로 했고, 그 차별 메커니즘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작동했다.
인종 차별과 혐오는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확산되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론되는 문제다. 며칠 전 프랑스 한 언론매체의 인터넷판에 한국의 대응정책을 두고 “감시와 밀고에 있어 세계 두번째 국가”라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감시·권위국가를 비판하려 하지만, 자신의 처지는 덮어둔 채 자유에 대한 맹신과 프랑스 우월주의에 빠져 한국 나아가 아시아를 인종 차별적으로 무시한다.
미국 대통령이 ‘중국 바이러스’라고 칭하거나 중국 탓을 하며 세계보건기구(WHO)에 지원을 중단한 것은 인종 차별적 혐오 돌리기의 전형이다. 이로 인해 서구에서 다른 인종에 대한 개인적 혐오 발언이나 폭력이 정당화될까 두렵다. 나아가 인종 차별은 단지 정체성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고, 현실에서 훨씬 심각한 비극을 초래한다. 코로나19 최대 발생국인 미국은 인종 차별이 빈곤 문제와 결합되어 어떤 양상을 드러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지난 8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코로나19 환자 중 흑인 비율이 백인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뉴욕주는 약간 다르게 라틴계 사망자 비율이 더 높지만, 시카고 등 흑인 인구가 많은 지역은 흑인 사망자 비율이 60~70%에 이른다.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입원하지 못한 환자들을 고려하면, 흑인과 라틴계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미국에서 이처럼 흑인과 라틴계가 코로나19에 취약한 것은 무엇보다 빈곤 때문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밖에 나가 일하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다. 이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자가 격리가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평소 빈곤으로 인해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이들은 인종 편견 때문에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을까 봐 마스크 착용을 꺼린다.
빈곤에 따른 코로나19 희생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더 심각하다. 이 국가들의 확진자 수는 최근 급속한 증가 추세에 있다. 인도의 경우 코로나19로 도시봉쇄령이 발동되면서, 빈곤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도시 탈출을 감행하지만, 이 과정에서 감염이 급속히 확산될 위험이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빈곤한 도시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할까 봐 도시 봉쇄를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지제크의 말처럼 코로나19 대유행은 전세계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또한 이번 사태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종 및 계급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코로나19 대유행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해준다. 코로나19로 세계는 이러한 인종과 계급 문제를 해결하고, 급진적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 최병두 한국도시연구소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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