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념식 거부 광복회와 야권 시민단체 등 별도 기념식 

 

제79주년 광복절인 15일 항일독립선열 선양단체 연합(항단연)이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에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이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

 

“독립정신은 기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것”(역사 시민단체)

“빼앗긴 것은 찾아올 수 있지만 내어준 것은 찾을 수 없다”(역사동아리 학생들)

 

“아리(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이름)는 이곳에 머무른다”(독일 베를린 시민들)

 

8월15일, 79년 전 이날 되찾은 빛을 잊지 않고자 나선 시민들이 저마다의 태극기를 쥔 채 거리에서 외쳤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규탄만큼 우리 정부의 역사 인식에 대한 우려와 비판 목소리가 크게 터져나왔다는 점만은 예년의 광복절과 달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64개 역사·시민사회 단체가 모인 ‘역사 왜곡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는 15일 오후 ‘국민과 함께하는 제79주년 광복절 기념식’을 열었다. 이들은 “독립 정신은 기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행동도 독립투쟁사에 한 획을 남길 거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고 했다. 이날 오전 광복회 등 독립운동단체가 사상 처음 정부의 공식 경축식 참석을 거부하며 별도의 기념식을 연 데 이어, 주요 역사 시민 단체들도 따로 기념식을 열기로 한 것이다.

시민 300여명은 땡볕 더위에 연신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한 손엔 작은 태극기를 꼭 쥐고 “친일 관장 임명 철회” “매국 정권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전북 전주에서 온 최용웅(51)씨는 “오늘 아침 케이비에스(KBS)에 기미가요가 나왔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뉴라이트의 의도가 계속 보이는 것이 화가 나서 답답한 마음에 왔다”고 말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022년 9월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 임명부터 지난주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까지 10건의 인사와 지난해 8월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시도 등 3건의 사건을 언급하며,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분노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백범 김구 증손자인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책 ‘테러리스트 김구’가 출간된 상황을 짚고 “이런 시대착오적인 일을 시도하는 것이 뉴라이트이고 대표적인 인물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임명됐다”며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싸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념식을 마친 시민들은 효창공원부터 대통령실 근처 삼각지역까지 “뉴라이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하라”는 펼침막을 앞세우고 3㎞ 정도 행진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했던 인쇄소, 만세운동을 벌였던 거리 등 독립역사와 관련된 장소가 행진하는 거리 곳곳에 있었다.

대학생역사동아리연합 소속 학생 30여명도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여 ‘뉴라이트 인사 등용, 굴욕적 역사외교를 거부하는 대학생 기자회견’을 열어 “윤 정부의 적극적인 역사 부정, 역사 왜곡은 임기 내내 이어져 왔다”며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강제동원 제3자 배상안을 강행했을 뿐 아니라 국방백서 속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표기,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합의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다”며 윤정부의 역사 인식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군위안부 기림의 날,  독일에선 소녀상 지킴이 집회

1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독일 여성단체 용기의 아네 회커가 발언하고 있다. 베를린/연합
 

독일 베를린에선 ‘아리’(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이름)를 지키기 위한 집회가 벌어졌다. 14일(현지시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250여명이 미테구와 베를린시의 소녀상 철거 방침을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현장에선 만삭의 일본군 ‘위안부’ 사진으로 알려진 고 박영심 할머니(2008년 별세)와 문필기(2008년 별세) 할머니를 비롯해 중국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대만, 네덜란드, 동티모르 등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여성 9명의 생애를 증언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여성단체 ‘가브리엘라 독일’의 회원인 필리핀 출신의 캐서린 아본(39)은 “필리핀도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 피해의 역사가 있다. 소녀상과 비슷한 상징물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 압력으로 철거되기도 했다”며 “베를린에서 소녀상은 그 자체로 이미 모든 성폭력 피해자를 상징하고 있다. 아리를 철거하고 다른 상징물을 설치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 김가윤 고나린 고경주 기자, 베를린/장예지 특파원 >

 

광복절 행사 사상 처음 두 동강…국회의장, 독립지사 참배- 유족 초청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퇴장하며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제79주년 8·15 광복절 행사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문제를 두고 두 동강 났다.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촉구하고 있는 광복회와 야당은 정부가 주최하는 공식 경축식을 거부했다. 입법부 수장이자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우원식 국회의장도 정부 경축식에 불참했다. 광복절 행사가 쪼개진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다. 국회의장 불참도 2020년 박병석 당시 의장이 국외 순방 일정 탓에 참석할 수 없었던 걸 제외하면 전례가 없다.

정부가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광복절 경축식엔 윤석열 대통령 부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추경호 원내대표 등 여당 의원 50여명이 참석했다. 야당에선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가 유일하게 자리를 채웠다. 통상 기념사는 광복회장이 맡았지만, 이종찬 회장이 경축식에 불참하면서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장이 대신했다. 한동훈 대표는 행사 뒤 기자들과 만나 “불참하면서 마치 나라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너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유감스럽다”며 불참한 우 의장과 야당을 비판했다.

같은 시각,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선 광복회 등 37개 단체가 모인 독립운동단체연합, 25개 독립운동가 선양 단체가 꾸린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이 별도의 광복절 기념식을 열었다. 김 관장을 ‘뉴라이트’라 지목한 이들은, 윤 대통령이 그의 임명을 철회하지 않는 데 항의해 별도 행사 개최를 예고해왔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기념사에서 “최근 진실에 대한 왜곡과 친일 사관에 물든 저열한 역사 인식이 판치며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며 김 관장 임명을 거듭 비판했다.

이 자리엔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 등 야당 정치인 100여명도 참석했다. 박 원내대표는 “윤석열 정권이 자행 중인 ‘역사 쿠데타’로 독립 투쟁의 역사가 부정되고 대한민국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날 백범기념관이 있는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역 참배도 했다. 조국혁신당 지도부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정권 굴종 외교 규탄’ 회견을 열어 김 관장 임명 철회 요구를 이어갔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우원식 국회의장이 15일 오후 서울 용산역광장에 설치된 강제동원 노동자상에 헌화한 뒤 동상을 닦아주고 있다. [연합]
 

전날 밤늦게 “독립운동을 왜곡하고 역사를 폄훼하는 광복절 경축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힌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날 광복회 기념식에도 불참했다. 그 대신 우 의장은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독립지사 묘역에 참배한 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국회로 초청해 오찬을 했다. 의열단 김한 선생의 외손자로 한-일 역사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만큼, 정부의 역사 인식에 반대 뜻을 분명히 하면서도 입법부 수장으로 갈등 자체를 정쟁화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역사왜곡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국민과 함께하는 제79주년 광복절 기념식’을 한 뒤 ‘친일 뉴라이트 논란’이 있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명 철회를 촉구하며 대통령실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 관장 임명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대통령실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반쪽 행사라는 표현은 잘못됐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독립운동과 광복의 주체가 광복회 혼자만이 아니다. 특정 단체가 인사 불만을 핑계로 빠졌다고 광복절 행사가 훼손된다고 보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편, 강원도 광복절 경축식에선 김진태 강원지사가 “궤변으로 1948년 건국을 극구 부인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말해, 김문덕 광복회 강원도 지부장이 거세게 항의하고 퇴장하는 등 파행이 빚어졌다.                                               < 손현수 이우연 장나래 박수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