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엔 면죄부 주고 '흡수통일' 다짐
'식민 모국' 살뜰히 챙기는 세심함 돋보여

일제 가혹사 은폐하고자 '광복' 의미 왜곡
광복은 '자유 향한 투쟁'이라는 궤변 주장

흡수통일 천명하고 대화하자?…이율배반
청소년 세대, 반공·반북 교육 본격화 예고

일본 마이니치 "작년에 이어 일본 비판 전무"

 

윤석열 대통령의 제79회 광복절 경축사엔 일본도 강점도 식민지도 없었고, 북한과 자유통일만 있었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잔혹했던 35년의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고 조국을 되찾게 된 걸 축하하는 국경일인 만큼, 마땅히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일제의 강점과 식민 통치, 그리고 민족의 독립운동과 조국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어야 했지만 윤 대통령은 일제 잔혹사를 망각 속에 묻기에 바빴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4.8.15 [대통령실 제공] 연합

 

일제도 강점도 식민도 없는 광복절 경축사

'식민 모국' 살뜰히 챙기는 세심함 돋보여

그러나 윤 대통령의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미 "일제 강점기"란 표현을 포함해 사실상 일제 식민지 과거사를 통째로 들어냈던 터라 그러려니 했지만, 올해 경축사에선 아예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는 물론이고 일본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어 '초현실적'이란 인상을 줬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의 국권을 침탈해 45년 패망해 물러날 때까지의 잔혹했던 시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한 줄도 들어 있지 않았다.

취임 첫해인 2022년 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선 그나마 "일제 강점기"란 표현이 모두 4차례 나왔다. 그 중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라거나 "조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던 캄캄한 일제 강점기"란 표현이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엔 "국권을 회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암흑의 시기"라고만 언급했다. 올해엔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라거나 "국권을 잃은 암담한 상황"이 전부였다. 누구로부터 국권을 침탈당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딱 한군데에서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됐다"란 표현을 써가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제국주의 세력의 국권 침탈"이란 말도 썼지만, '일본' 제국주의란 점은 애써 숨겼다. '식민 모국' 일본을 살뜰히 챙기는 윤석열의 세심함과 배려가 돋보인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1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열린 '광복 파티'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가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의 사진 앞에서 임정 요인 맞추기 과제를 하고 있다. 2024. 08.15 연합

 

일제 가혹사 은폐하고자 '광복' 의미 왜곡

광복은 '자유 향한 투쟁'이라는 궤변 주장

'광복'이란 표현을 썼지만, 광복이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인데도, 윤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가해자 일본을 은폐하고자 "우리의 광복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결실이었다"라거나 "1919년 3·1운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국민들의 일치된 열망을 확인했다"는 등의 해괴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날 경축사에서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그리고 교육·문화 분야와 외교, 군사적 독립운동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말했지만, 이를 막연히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주장함으로써 한반도를 강점하고 한 민족을 억압, 수탈했던 일제를 타도하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란 본질을 숨겼다.

그 논리에 따르면, 자연히 윤 대통령의 '자유를 향한 투쟁'의 표적은 일제에 의해 같은 고난을 겪은 동족 북한이 된다. 그는 "완전한 광복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며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 한반도 전체에 국민이 주인인 자유 민주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는 그날, 비로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가해자 일본은 봐주고 화살을 북한으로 돌린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등에서 지난달 말 수해로 집을 잃은 어린이와 학생, 노인, 환자, 영예 군인 등을 평양으로 데려가 피해복구 기간 지낼 곳을 마련해주겠다고 밝혔다. 2024. 08.10 [조선중앙통신=연합]

 

가해자 일본엔 면죄부…화살은 북한에

'자유 통일'은 '북한 흡수통일'과 동의어

그러면서 '자유 통일' 추진을 선언했다. 다른 말로 하면 북한을 흡수통일하겠다는 공언이다. 그런 의도를 담았는지, 올해 경축사는 지난 두 차례와는 달리 처음으로 " 2600만 북한 동포"를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윤 대통령은 "저는 오늘, 헌법이 대통령에게 명령한 자유민주주의 평화통일의 책무에 의거해서, 우리의 통일 비전과 통일 추진 전략을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 그리고 국제사회에 선언하고자 한다"면서 3대 전략 △ 자유 통일을 추진할 자유의 가치관과 역량 배양 △ 북한 주민의 자유 통일에 대한 열망 촉진 △ 자유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지지 확보를 들었다. 북한 흡수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에서 수구 극우 보수 기득권 세력을 강화하고 심리전을 통해 북한 체제를 흔들어 놓는 한편, 흡수통일을 위한 국제사회 여론을 조성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대통령실에선 이를 '8·15 통일 독트린'으로 규정했다.

 

광복절인 15일 오후 자유통일당이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인근에서 '8·15 국민혁명대회'를 열고 있다. 2024. 08.15 연합

 

흡수통일 천명하고 대화하자?…이율배반

청소년 세대, 반공·반북 교육 본격화 예고

이렇듯 '흡수통일'을 천명해놓고도 윤 대통령은 "재작년 광복절의 '담대한 구상'에서 이미 밝힌 대로 비핵화의 첫걸음만 내디뎌도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시작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 계속 추진, 그리고 단절된 남북 대화를 위한 실무 차원의 '대화 협의체' 설치를 제안해 이율배반의 태도를 보였다.

특히 '자유 통일을 추진할 자유의 가치관과 역량 배양'과 관련해 윤 대통령은 "가짜 뉴스에 기반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는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는 무서운 흉기"라며 "선동과 날조로 국민을 편 갈라 그 틈에서 이익을 누리는 데만 집착하는 이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반자유 세력, 반통일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을 "검은 선동세력"이라고 규정짓고 특히 청년과 미래세대를 상대로 북한 흡수통일 '의식화'를 위한 "첨단 현장형 통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뉴라이트의 친일 매국 교육에 이어 반북, 반공 교육이 본격화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작년 경축사에선 현 남북관계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의 대결"로 규정한 뒤 국내에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이 있고 그들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워도 현 정부를 반대하고 비판하면 모두 '공산전체주의 세력'이고 '반국가세력'이란 얘기였다.

그러나 윤 정권은 출범 후 지난 2년 3개월 동안 '바이든/날리면' 발언 이후 MBC 등 비판언론 탄압과 대통령실 경호처의 '입틀막' 사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 등 야당 정치인과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수사 등을 통해 검찰독재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빙자한 '자유전체주의'의 본색이 들통났다.

 

일본 패전일인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지요다구 야스쿠니신사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본도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24.8.15 연합

 

일본 언론, 일제 과거사 언급 부재 주목

마이니치 "작년에 이어 일본 비판 전무"

연합뉴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이날 경축사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총 50회 등장했고, 이는 지난해 경축사 27회, 2022년 경축사 33회보다 많이 늘어났다. 뒤이어 통일(36회), 북한(32회), 국민(25회) 등이 많이 언급됐고, 대한민국(18회), 국제사회(10회), 북한 주민(10회), 인권(10회), 통일 대한민국(10회), 자유 통일(9회) 등 표현도 썼다.

당연히 일본 언론도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제 과거사 언급이 없는 데 주목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날 '한국 대통령 연설에 일본 비판 없어'란 기사에서 "(한국)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서는 역사 문제 등을 둘러싼 대일 비판을 담는 사례가 많았으나 대일 관계를 중시하는 윤 대통령의 연설에서는 작년에 이어 일본 비판이 전무했다"며 "광복절 연설에서 일본과 관련한 생각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덧붙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한국 대통령 광복절 연설에서 대일 관계 언급 없어'란 기사에서 윤 대통령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 행사 연설에서 대일 관계나 역사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했고, 극우 산케이신문도 "연설의 대부분을 통일 문제에 할애, 대일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전했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항일독립선열 선양단체 연합(항단연)이 15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에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이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하고 있다. 2024. 08.15 연합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덮을 수 없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최악의 경축사"

한편,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날 정부의 광복절 기념식 참가를 거부하고 별도로 진행한 기념행사에서 "최근 왜곡된 역사관이 버젓이 활개 치며, 역사를 허투루 재단하는 인사들이 역사를 다루고 교육하는 자리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라며 "준엄하게 경고한다.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으며 자주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투쟁과 헌신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성과를 폄훼하는 일은 국민들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도 논평을 통해 "일본의 반성과 책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최악의 경축사"라면서 "일본이 껄끄러워하는 민감한 사안에는 알아서 스스로 언급을 피했고, 북한 33회, 통일 36회를 언급하면서도 항일이라는 표현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독립기념관장 임명 문제로 사상 처음 광복회가 정부 기념식에 불참하는 초유 사태를 맞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회피했다"며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항일독립지사에게 차마 낯을 들기 어렵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 이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