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탄광에 다수 조선인 강제동원 전범기업 불법성 인정

 

 

일제강점기 사도광산 운영기업이자 제1의 전쟁범죄기업으로 지목받는 미쓰비시그룹 계열사 '미쓰비시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 측에 수억 원대의 위자료를 물어주게 됐다.

일본정부는 최근 사도광산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 과정에서 '강제동원' 표기를 끝내 거부했고, 한국정부도 이런 일본 결정을 사실상 묵인하면서 시민사회와 야당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 법원이 일본 탄광으로 다수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전범기업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유족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광주지방법원 민사11부(재판장 유상호)는 27일 오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상업씨 등 피해자 9명의 유족들이 미쓰비시머티리얼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사건 1심 선고 기일을 열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이 사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지난 2020년 1월 법원에 접수된 지 4년여 만이다.

이날 재판부는 9명의 원고(피해자 유족) 가운데 5명에게는 청구 금액 전부를 손해배상하라고 전범기업에 명령했다.

고 조천강·김종오·이상업·윤재찬씨 자녀에게는 각각 1억 원을, 고 박정업씨 자녀에게는 76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한 것이다.

또 2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청구한 고 박정업씨 유족에게는 1666만 원을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상업(1928~2017·전남 영암) 어르신이 생전 한일 양국에서 펴낸 강제동원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소명출판)에 직접 스케치해 넣은 탄광 강제노동 모습. 이상업 어르신은 열다섯 살 소년시절인 1943년 11월 ‘미쓰비시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는 후쿠오카현 소재 가미야마다 탄광에 끌려가 해방 직후까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광주지방법원은 그의 유족이 낸 손해배상청구를 받아들여 2024년 8월 27일 전범기업 측에 1억 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

 

다만 이날 재판부는 함께 소송을 제기한 나머지 원고 3명의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각 사유를 두고 상속 문제 등 여러 관측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한 사유는 판결문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확인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 9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일제강점기 미쓰비시광업이 일본에서 운영 중이던 가미야마다 탄광 등 여러 탄광에 강제 동원됐다. 다만 최근 유네스코 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사도광산 피해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모두 고인이 된 9명의 피해자들은 당시 조선인 신분으로 차별 속에서 감당하기 힘든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렸고,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혹사당한 몸을 이끌고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강제 노동 과정에서 얻은 질병과 장애 등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고난은 자녀 세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들 피해자들은 동원 당시 20~30대였고, 영암·보성 등 전남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인이 되지 않은 청소년(10대)도 포함돼 있다.

"사도광산 운영기업에 법원이 단죄 내린 것"

원고들을 지원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국언 이사장은 판결 선고 뒤 기자들과 만나 "조선인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일본의 허무맹랑한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그러면서 "비록 민사 재판이기는 하나, 최근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 과정에서 많은 비난을 샀던 사도광산 운영기업에 법원이 단죄를 내린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여전히 안 들리는 재판장 목소리 27일 오후 광주지방법원 별관 법정에서 열린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판결 선고 뒤 기자들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관계자, 이 사건 원고 측 소송 대리인 등이 모여 재판장이 낭독한 주문 내용을 비교하며 정리하고 있다. 이날 역시 재판장의 주문(재판 결론) 낭독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듣기 힘들다는 지적이 사건 관계인과 방청객들에게서 나왔다.광주지법에서는 선고 기일 판결 주문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 원고 가운데 3명의 손해배상 청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은 것과 관련해 소송 대리인은 "법원으로부터 판결문을 받아보는 대로 기각 사유를 살핀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한편 이날 재판에서 승소한 이 아무개씨의 부친 고 이상업(1928~2017·전남 영암)씨는 생전에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지원을 받아 자신이 겪은 강제징용 관련 수기를 한일 양국에서 펴내기도 했다.

이씨는 일제의 발악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3년 11월, 그의 나이 열다섯 살에 후쿠오카현 가미야마다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씨가 겪은 탄광 생활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황국신민의 영예로운 산업전사'는 허울 좋은 말과 달리, 그는 그 곳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하 1500m 막장에서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저자 이상업은 당시 탄광에서 한 소년의 죽음을 목격하고 수기에서 체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그 소년의 죽음에 모두 소리 없는 축복(?)을 보내고 있었다. 지옥 같은 노동과 굶주림과 구타에서 일찍 해방된(?) 그 소년의 죽음을 차라리 부러워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그 막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업 어르신은 1948년 영암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33년 동안 교편을 잡은 뒤 은퇴하고 지난 2017년 운명했다. < 김형호 기자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상업(1928~2017·전남 영암) 어르신이 생전 한일 양국에서 펴낸 강제동원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소명출판) 책자를 들고 있는 모습. 이상업 어르신은 열다섯 살 소년시절인 1943년 11월 ‘미쓰비시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는 후쿠오카현 소재 가미야마다 탄광에 끌려가 해방 직후까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광주지방법원은 그의 유족이 낸 손해배상청구를 받아들여 2024년 8월 27일 전범기업 측에 1억 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 미쓰비시머티리얼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악명높았던 사도광산 등 다수 탄광을 운영했던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