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권 인사들에게 타격을 주려는 정치적 목적의 수사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세계 1% 과학자’다. 최근 10년간 논문 인용 횟수가 전 세계 상위 1%에 해당한다. 노벨상 예측 후보 발표로 유명한 글로벌 학술정보기업 클래리베이트가 해마다 집계하는 통계다. 신소재 분야의 권위자인 그는 해외 학회와 강연, 세미나에 자주 초청된다. 지난 6일에도 유럽에서 열린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재료 학회’(MATSUS) 초청으로 일주일 동안 출장을 다녀왔다. 올해에만 8번째 해외 출장이다.
‘세계 1% 과학자’가 출국허가신청서 내야 하는 까닭
그의 해외 출장은 다른 학자에겐 필요 없는 절차를 요구한다. 법원과 검찰의 출국 허가를 받는 일이다. 그는 현재 재판받는 피고인 신분이라서 출국금지 돼 있다. 해외 출장 때마다 ‘출국허가신청서’를 제출한 뒤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의 첫 출국 허가는 검찰이 출국일이 임박해서 내주는 바람에 출장 직전까지 애를 태워야 했다. 담당 검사는 별다른 이유 없이 차일피일 허가를 미뤘다.
백운규는 1심 재판만 4년째 받고 있다. 재판을 받는 데에는 시간과 돈과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기소되면 인생이 결딴난다”라는 말에 역설적으로 100% 공감하게 됐다. 윤 대통령의 경고(!)대로 피고인이 되면 일상이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단절될 위기를 맞는다. 그도 처음에는 인생이 결딴날 것만 같았다. 수사가 시작되자 그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보수언론은 그를 영혼 없는 ‘어용학자’로 몰아갔다. “그동안 쌓아온 학자로서의 명예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기소 후에는 기자들이 그가 몸담은 학교 쪽에 징계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왔다. 마치 해고가 당연하다는 뉘앙스였다. 다행히 학교 재단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그의 교수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백운규는 채희봉 전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정재훈 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사장과 함께 ‘월성원전 1호기 조기 폐쇄’를 강요한 혐의(직권남용)로 2021년 6월30일 기소됐다. 재판이 한참 진행된 2023년 7월에는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기소됐다. 문재인 정권의 실세였던 김수현이 무려 2년 뒤에 기소된 건 이 수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가급적 더 많은 전 정권 인사들에게 타격을 주려는 정치적 목적의 수사였다.
삼중수소 다량 배출 노후 원전을 ‘멀쩡한 원전’ 전제한 수사
검찰은 설계수명(30년)이 2012년에 끝나 가동이 중단됐다가 2015년 수명연장으로 재가동된 월성1호기를 ‘멀쩡한 원전’으로 전제하고 수사를 했다. 월성1호기의 경제성이 충분한데도 이를 불합리하게 저평가해 조기 폐쇄했다는 논리였다. 안전성은 제쳐두고 손실이 얼마인지만 따졌다. 하지만 안전성을 평가하면 월성1호기를 멀쩡한 원전으로 보는 건 어불성설이다. 1983년 상업 운전을 시작한 이 원전은 2000년대 들어 노후화로 인해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설계수명을 연장한 뒤에도 고장은 계속됐다. 재가동 1년 만인 2016년 5월 압력조절밸브 고장으로 가동이 중단됐고, 2017년 5월에도 원자로냉각재펌프 2대가 고장나 정지됐다.
더욱 심각한 건 방사성 물질 노출 위험이다. 월성 1~4호기는 중수로형 핵발전소다. 경수로형보다 삼중수소를 10배나 더 많이 배출한다. 삼중수소는 사람 몸속에 흡수되면 세포 돌연변이 발생률을 높여서 발암물질로 분류된다. 월성원전 인근 주민들 몸속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삼중수소가 검출됐다. 경주시 월성원전 방폐장민간환경감시기구가 2014년 2월부터 15개월 동안 이 원전 인근 주민 246명, 경주시 주민 125명, 울진핵발전소 인근 주민 124명을 대상으로 체내 삼중수소를 조사한 결과 원전 주변의 주민이 경주 시내 주민보다 검출 평균치가 2.6배 이상 높았다. 앞서 다른 조사에서는 이 수치가 무려 25배나 차이가 났다(2011년). 월성원전 주변 지역 빗물과 지하수의 삼중수소 농도가 다른 원전 지역보다 5~10배 높다는 조사(2010년)도 있다.
월성1호기가 고장으로 멈출 때마다 지역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특히 2016년 9월12일 경주 일대에 관측 이래 가장 큰 규모(5.8)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주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참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수원은 지진 발생 1시간 후 “원전은 정상 운영되고 있다”고 발표했으나 4시간 뒤 월성 1~4호기가 모두 멈춰 섰다. 한수원은 “정밀 안전 점검을 위해 정지시켰다”라고 발표했지만, 주민들은 믿지 않았다. 지진 발생 이튿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피해 지역을 방문한 뒤 주민들의 농성장을 찾았다. 주민들은 문재인에게 “대통령이 되거든 원전 문제를 꼭 해결해달라”고 했다. 월성1호기 조기 폐쇄가 문재인 정권의 공약이 된 배경이다.
법원 2017년 “월성1호기 수명연장 처분은 위법” 판결
2017년 2월7일 서울행정법원은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월성1호기 수명연장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지역 주민 2000여명이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를 상대로 낸 소송이었다. 재판부는 원안위의 수명연장 처분이 절차를 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안전성 평가도 위법했다고 판결했다. 특히 안전성 평가의 위법성을 중요한 요인으로 봤다. 원자력안전법령에는 수명연장을 위한 안정성 평가 때 최신기술 기준을 적용하도록 돼 있다. 월성 1~4호기를 한국에 수출한 캐나다는 원자로에서 사고가 났을 때 방사능이 유출되지 않도록 원자로 격납용기에 수문과 이중 밸브 등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규정(R-7)을 1991년 도입했다. 이 규정에 따라 1997년~1999년 건설된 월성 2, 3, 4호기에는 안전장치가 설치됐다. 그러나 이보다 10년 전에 건설된 월성1호기에는 이 장치를 설치할 수 없었다. 법령에 따르면 2015년 월성1호기의 수명연장을 결정할 때 수문과 이중 밸브 등의 설치 여부를 따져야 했지만, 원안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안위는 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2020년 5월 각하 판결을 했다. 앞서 2019년 12월24일 월성1호기가 폐쇄됐기 때문에 더 이상 소송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월성1호기는 안전성 면에서 ‘불안한 원전’이었다.
‘탈원전’ 수사는 정치적 편향성 시비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 영구 정지된 고리1호기도 당시 한수원은 경제성은 물론 안전성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를 들어 영구 정지를 결정했다. 고리1호기 폐쇄가 월성1호기와 다른 점은 보수정권이 원전 폐쇄를 주도했고, 여야 모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검찰, “한수원은 손실, 국가는 이득” 이유로 배임 적용
검찰은 백운규와 함께 기소된 정재훈에게 한수원 사장으로서 회사에 손실을 끼친 혐의(배임)를 적용했다(백운규는 배임 교사 혐의가 나중에 추가됐다). 검찰은 공소장에 “백운규 등 산업부 관계자들의 지시에 따라…(중략) 월성1호기의 가동중단을 실행함으로써 회사에 1481억원 상당의 손해를 가하고, 국가에 이 손해액 상당의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게 했다”라고 썼다. 국가 사정기관이자 ‘공익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검찰이 한수원의 주주나 할 법한 주장을 한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백운규와 채희봉은 노후 원전을 계속 돌려 돈을 벌려는 공기업(한수원) 경영진에게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결정을 하도록 한 것이다. 검찰은 국민의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공기업의 탐욕을 막은 공직자를 처벌하려고 한다.
이처럼 모순투성이인 검찰 수사가 별다른 제약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나중에 무죄가 난 산업부 공무원들의 ‘감사 방해’ 프레임이 먹힌 탓이다. 월성1호기 폐쇄가 관련 자료를 폐기해야 할 만큼 불법이었다는 인식을 퍼뜨려 검찰 수사가 힘을 받을 수 있었다. 때마침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사태까지 겹친 것도 윤석열 사단엔 호재였다. 윤 사단은 ‘현 정권이 범죄를 감추기 위해 검찰총장을 쫓아내려고 한다’고 여론전을 폈다. 여론도 호응했다. 징계 사태가 윤석열의 판정승으로 끝난 뒤 2021년 1월15일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는 긍정(38%)과 부정(53%)의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졌다. 윤석열은 여당의 정권 재창출을 막을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윤석열 대선 출마 선언 이튿날 ‘탈원전’ 기소
윤석열은 2021년 6월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검찰총장을 중도 사퇴한지 석 달여만이다. 그는 출마 연설에서 밑도 끝도 없이 “법을 무시하고 세계 일류 기술을 사장한 탈원전으로 국민이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한 노후 원전 폐쇄가 ‘세계 일류 기술’을 고사시킨다는 주장은 지나친 침소봉대였다. 검찰은 이튿날 백운규 등을 전격 기소했다. 윤석열의 출마 선언에 힘을 실어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윤석열은 “문재인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심판하겠다”는 출사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돈 지난 11일 그의 지지율은 17~20%대를 기록했다. 그가 심판하겠다던 문재인은 물론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에 견줘 가장 낮다. 검찰을 동원해 정권을 잡은 ‘검찰 정권’의 예고된 몰락인가. < 한겨레 이춘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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