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윤석열 내란의 전위대로 나선 내력

[극우 개신교 집단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본다-상]


언더우드·아펜젤러 입국으로 시작된 140년 역사
학교·병원 지어 서구 근대 문명 도입 창구 구실

한국 개신교 주요 특징은 분파·반공·성장주의
일제 신사참배 강요가 뿌린 장로교 1차 분열 씨앗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885년 4월 5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제물포항에 들어온 범선에서 두 미국인 청년이 내렸다.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회 소속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나이는 언더우드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였다. 이날은 부활절이었다.

 

이들은 차례로 서울에 들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회를 지어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최대 개신교 교파인 장로교와 두 번째 교단인 감리교는 각각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와 아펜젤러의 정동제일교회를 모교회로 삼고 있다.

 

이들보다 먼저 들어온 선교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1832년 충남 안면도 남단 고대도에 상륙했다가 20일 만에 떠난 카를 귀츨라프,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들어왔다가 성난 주민의 칼에 맞아 숨진 로버트 토머스, 1884년 6월 방한해 고종에게 선교 허가를 요청한 로버트 매클레이, 석 달 뒤 들어와 이듬해 광혜원(제중원으로 개칭)을 세운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 등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이들의 입국을 개신교 선교 역사의 출발로 보고 있다.

 

한국교회총연합이 올해 부활절 전날인 4월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펼치는 부활절 퍼레이드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후손인 피터 언더우드와 실라·매슈 셰필드 등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4월 3일과 6일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선교 140주년 기념예배와 기념대회가 각각 열린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왼쪽)와 헨리 아펜젤러
2023년 4월 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퍼레이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온 범선 모형을 앞세우고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광조동방(光照東邦)이라고 적힌 십자가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7년 성탄절에 세웠던 등(燈)을 재현한 것이다. (서울시 제공)

 

신분 타파와 남녀평등 외치고 독립운동에도 투신

 

140년 전 이들이 처음 뿌린 신앙의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전국의 개신교 교회는 8만 3883개를 헤아린다. 교인은 967만 5761명으로 전체 인구의 19.73%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 수는 전 세계 17위, 아시아에서 4위에 랭크돼 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끼친 영향은 지금의 교회와 신자 숫자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근대적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을 세워 과학기술을 비롯한 서양 근대 지식과 학문을 도입했으며, 신분 타파와 남녀평등이라는 근대적 인권 개념과 서구 민주주의 사상을 일깨웠다.

 

이들에게 영향받은 개신교 신자들은 당시로서는 합리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고 억압과 차별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였다. 개신교 신자 가운데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 때만 해도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 소속이었고 나머지가 천도교(15명)와 불교(2명)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안창호·이승만·이동휘·김규식·손정도 등도 크리스천이었다.

 

1920년대 이후 미국 교회의 근본주의 영향을 받아 현실도피적인 분위기가 자리잡긴 했어도 우리나라 초창기 개신교 신자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신앙 이외의 생활에도 모범적이었다.

 

15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 주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5.3.15. 연합

 

극우 포퓰리즘 전위대로 나서며 비호감 자초

 

그러나 지금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어떤가. 영성(靈性)을 추구하기보다는 물신(物神)을 숭배하고, 존중과 포용이 아닌 차별과 혐오를 전파하며, 평화를 부르짖는 대신 폭력을 외치고 있다. ‘빨갱이 척결’과 ‘동성애 추방’에서 요즘은 ‘중공 OUT’이란 구호도 추가됐다.

 

개신교가 주도하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는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난무하고 비논리적 주장과 반지성적 행동이 넘쳐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후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이를 지켜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우려스럽다.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광훈 목사는 “미친 운전사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으니 끌어내려야 한다”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어록을 내세워 문재인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본회퍼의 길을 선택했다”면서 종북 좌파 척결을 주장하고 있다.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한 순교자를 따르겠다면서, 파시스트 행태를 보이는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 목사는 대통령 탄핵 심판과 관련해 국민 저항권을 거론하며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을 부추긴 데 이어 헌법재판소를 겁박하고 있다. 정작 민중이 독재 정권에 신음할 때 침묵했거나 권력 편에 섰던 보수 개신교단이 이제 와서 국민 저항권을 내세우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떠받들면서 그를 권좌에서 쫓아낸 4·19혁명을 국민 저항권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16일 서울 세종로사거리 인근에서 열린 광화문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2025.3.16. 연합

 

어느 때부터인가 개신교를 의미하는 기독교는 ‘개독교’란 멸칭으로 불리고 있다(기독교는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개신교를 지칭하므로 그리스도교란 용어로 대체해 쓰고 있다). 2024년 한국리서치의 종교 인식 조사에서도 개신교(35.6)는 호감도가 불교(51.3)와 천주교(48.6)에 훨씬 못 미쳤다.

 

그 원인은 여럿이지만 최근 윤 대통령 내란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이 개신교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개신교 안에서도 전 목사를 비롯한 일부 목사들이 극우 포퓰리즘의 전위대로 나서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배경을 분석하려면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이를 통해 형성된 고유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분파주의, 신비주의, 반공주의, 물신주의, 성장주의, 개인 숭배, 세습주의 등을 꼽을 수 있다.

 

과열 경쟁 막으려고 전국을 선교단체별로 분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발을 디딘 이래 조선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서양 선교사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너도나도 앞다퉈 조선에 진출하다 보니 특정 지역에 집중돼 과열 경쟁을 빚었다. 반면 공백으로 남은 지역도 생겨났다.

 

개신교 선교단체들은 선교지 분담 방안을 협의한 끝에 1893년 미국 북장로회는 평안도·황해도·경상북도, 남장로회는 전라도(당시에는 제주도 포함)와 충청도, 캐나다장로회는 함경도를 맡기로 하고 부산·경남은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가 공동 구역으로 삼았다.

 

1909년 감리회와도 추가 협정이 이뤄져 평북 영변 일대, 황해도 남부, 충청, 강원 남부는 미국 북감리회가 맡고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는 미국 남감리회가 담당하기로 했다. 부산·경남은 호주장로회와 미국 북장로회가 나눠 맡다가 1913년 호주가 전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울은 분담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침례교·성결교·구세군·성공회 등은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정에 따라 한반도의 선교 분담 지역을 나타낸 지도

 

선교지 분할 정책은 불필요한 마찰이나 인력·재정 낭비를 줄이고 복음화 효과를 높이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됐으나 지방색에 따른 교권 대립을 낳고 해방 후 교회 분열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는 교세가 가장 큰 데다가 선교사 파송 본부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고 선교지까지 분할하다 보니 분열도 가장 많았다. 다른 종파에 비해 목사보다 장로들의 권한이 강한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개신교 분열의 역사는 장로교 분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출옥성도들은 고신파 만들어 분리 독립

 

장로회 교단 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일제였다. 1930년대 들어 일제가 천황을 신격화해 숭배하게 하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자 개신교는 처음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감리교는 1936년, 장로교는 1938년에 각각 굴복했다. 일부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투옥됐고 순교자도 나왔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모습.

 

1945년 광복을 맞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신도들이 석방됐다. 이른바 출옥성도(出獄聖徒)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한 목회자는 목회를 중단하고 참회와 자숙 기간을 두자고 제안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가 이를 거부하자 한상동·박윤선 등 출옥파들은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이듬해 경남 진해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갈등은 갈수록 격화됐다. 상대방을 공산당이라고 서로 공격하다가 교단 주류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거부하는 강수를 두었고 출옥파들은 결별을 선언했다. 1952년 9월 진주에서 총노회를 따로 개최한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고신파의 출발이다. 고려신학교는 1947년 부산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1980년 고신대로 개명했다.

※ 후속편(중)이 아래 이어집니다

 

[극우 개신교 집단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본다-하]

교인 숫자로 세계 10대 교회가 모두 한국에 소재
정통성 없는 정권과 결탁해 이권 챙기며 고속성장

민주화로 위기감 느낀 보수교단 모여 한기총 결성
문재인 정권 퇴진 외치며 극우 파시즘으로 치달아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박정희 시대의 한국 개신교는 세계 교회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초고속 성장의 기적을 이뤄냈다. 전체 교회 수와 신도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초대형 교회가 속속 생겨났다. 등록 교인 숫자로 따질 때 세계 10대 교회가 모두 한국에 있다는 말이 나왔고, 조용기 목사가 이끄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기네스북에 등재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시기와 자료에 따라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한때 80만 신도를 헤아렸다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단연 1등이고 조 목사의 동생 조용목 목사의 안양 은혜와진리교회가 2위에 랭크됐다. 둘은 오순절 계통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소속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금란교회와 광림교회가 그 뒤를 잇고 있는데 김홍도 목사와 그의 형 김선도 목사가 각각 개척했다.

이밖에도 곽선희의 소망교회(예장통합), 옥한흠의 사랑의교회(예장합동), 나겸일의 인천 주안장로교회(예장통합), 한경직의 영락교회(예장통합), 하용조의 온누리교회(예장통합), 이종윤·최순영의 성남 할렐루야교회(초교파), 김삼환의 명성교회(예장통합), 김기동의 성락교회(침례), 김창인의 충현교회(예장합동) 등도 손꼽히는 대형교회들이다.

 

199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인 조용기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

 

조용기 목사는 이른바 ‘삼박자 구원론’을 펼쳤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건강과 물질의 축복도 따라온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 신유(神癒), 안수(按手) 기도, 금식 기도, 금요 철야 예배, 가정 중심의 구역 조직 등의 독특한 교회 운영 방식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시켰고 다른 교회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세속적 욕망과 헛된 집착을 버리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경전의 가르침과는 달리 기복 신앙과 물신 숭배는 한국 교회의 대세를 이뤘다. 교회 규모를 키우고, 예배당을 호화롭게 꾸미는가 하면,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보다는 부자나 출세한 사람들을 모범 신앙인으로 치켜세웠다. 빈부 격차와 인권 침해 등 독재 정권이 낳은 각종 폐해와 숱한 문제를 도외시한 채 “예수 천국 불신 지옥”만 외친다는 비난도 샀다.

 

개신교계의 이런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대회였다. 미국 침례교 소속의 그레이엄은 1952년과 1958년, 1984년과 2003년에도 방한했는데 한경직(예장통합 영락교회) 목사가 대회장을 맡은 1973년 집회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매일 50만 명 이상, 총 320만 명이 참석해 드넓은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웠으며 신도들의 “할렐루야”와 “아멘”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제는 서울이 ‘동방의 예루살렘’이고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나 참여주의를 눌렀음을 선언한 자리였다. 통역을 맡은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도 스타급 목회자로 떠올랐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에 신도들이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오른쪽 위 둥근 지붕의 건물은 여의도순복음교회다.

 

개신교 대표급 목사들 모여 ‘전두환 찬양’

 

박정희 정권이 독재로 치달을수록 권력에 순응하거나 결탁하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1966년부터 개신교계의 지도자급 목사들은 해마다(1967년 제외) 대통령을 초청한 가운데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어 나라의 안녕과 대통령의 건강을 기원했다. 이 행사는 코로나가 창궐한 2020년 온라인 예배로 진행한 것을 포함해 2023년까지 계속됐다.

 

최순실(최서원) 아버지 최태민이 박정희 대통령 딸 박근혜와 함께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을 결성해 구국기도회를 열며 국정에 개입했을 때도 예장통합(강신명), 예장합동(최훈), 기감(박장원) 등 10개 교단의 유명 목사 50명이 이름을 올려 충성심을 과시했다.

 

1977년 3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의 경로병원 개원식에 참석한 최태민 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박근혜 양. 연합

 

전두환 집권기에는 정권에 의한 종교 길들이기가 한층 노골화했고 개신교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1980년 8월 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초청 국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경직 목사가 설교했고 조향록(기장 초동교회), 김지길(기감 아현교회), 정진경(기성 신촌교회) 목사 등이 기도를 올렸다. 모두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었다.

 

한 참석자는 전두환에게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여호수아(모세 사후 가나안 수복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대인 지도자) 같은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축복했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 TV 화면 캡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찾아가 “병력을 투입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고 호소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나, 치안 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주로 내려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보안사 직원의 전두환 지지 성명 요청을 뿌리쳤다가 10·27 법난으로 혹독하게 탄압받은 불교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과 대비되는 행태였다.

 

1993년 8월 기성의 이선교 목사는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 인사 23명을 ‘반란방조죄’로 고발했다. 이 가운데 신현균(예장통합 성민교회), 지원상(루터교) 목사는 1996년 참회 성명을 발표했다.

 

교회 성장 공로 내세워 목사 개인숭배 유도

 

1970~80년대를 거치며 개신교단의 권력도 교체기를 맞았다. 한경직·김선도·김홍도·곽선희·강원용 등 월남 목사들의 영향력이 차츰 줄어드는 대신 조용기를 필두로 김삼환·옥한흠·김기동·김창인 등 남한 태생 목사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설교의 내용도 달라졌다. 월남 목사들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시험이나 심판을 강조한 데 비해 남한 출신들은 고도성장기에 걸맞게 하나님의 축복을 내세웠다. 반공주의와 복음주의 경향은 여전한 가운데 분열이 가속화하고 기복주의와 물질주의가 심화된 것이다. 신도들과 함께 이뤄낸 교회의 성장을 오로지 목사의 공로로 돌리며 개인숭배를 유도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며 종교를 이용했다. 대부분의 개신교 대형교회들은 정권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고 특혜를 누리며 성장을 구가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힘없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돌보고, 불의한 정권에 맞서고, 권력과 부를 지닌 자들의 횡포를 고발하고, 환경을 감시하는 목사와 개신교인도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비롯해 도시산업선교회, 활빈교회, 향린교회, 평안교회 등과 함석헌, 문익환, 서남동, 박형규, 문동환, 김관석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민중신학을 주창하고 노동자·빈민 선교에 나서는가 하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대형교회에 눌려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이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보수 성향으로 돌아섰으며 뉴라이트 인사로 변신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위기감 느낀 보수교단 결집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민주화 시대를 맞으면서 개신교 보수교단은 혼란에 빠졌다. 권력에 탄압받던 이른바 운동권 목사들과 진보 성향 교회들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소련 붕괴와 동구권 자유화,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 한중 수교, 한·베트남 수교, 남북한 교류 등이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해방 후부터 기치로 내걸어온 반공주의도 효능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위기감을 느낀 보수교단은 뭉치기 시작했다. 교회 일치 운동에는 등을 돌린 채 분열로만 치닫던 모습에서 돌변한 것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1988년 2월 29일 KNCC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발표였다. 월남 목사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1989년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출범했다.

 

보수교단들은 세계화 추세에 따른 종교 다원주의 경향도 큰 위협으로 느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 감신대 변선환·홍정수 교수가 1992년 교단과 학교에서 제명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지진이나 해일 등 자연재해로 인한 참사가 일어나면 ”예수를 믿지 않아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설교했다.

 

불상 훼손, 성당 방화, 이슬람교 모독 등의 반문명적 행위도 줄을 잇는데도 교단이나 목사들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부추기는 사례도 있었다. 2016년 서울기독대는 60대 개신교도의 사찰 훼손에 사과하고 복구 비용을 모금했다는 이유로 신학과 손원영 교수를 파면했다.

 

2016년 1월 17일 경북 김천시 개운사에 60대 개신교 신자가 난입해 불상을 부수고 법당을 훼손한 현장. 개운사 주지 진원 스님 제공

 

2000년대 들어서는 동성애 이슈도 새롭게 추가됐다. 성소수자들의 퀴어문화 축제 개최, 배우 홍석천의 커밍아웃, 트랜스젠더 모델 하리수 등장 등이 잇따르자 개신교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성경적 행위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2013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동성애를 수용한다는 이유를 들어 WCC 부산총회 개최를 반대하고 나섰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퀴어축제에서 축복식을 집례하거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이동환·윤여균·남재영 목사를 잇따라 출교 처분했다.

 

2019년 6월 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사장 앞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이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2019.6.1. 연합

 

교회 이탈자 늘자 근본주의·배타주의 강화

 

보수교단들이 이처럼 근본주의 회귀와 배타주의 강화로 치달은 것은 교회 이탈자들이 늘어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젊은이들의 탈종교화 경향은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유독 타격이 컸다. 교적은 유지한 채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명성교회·금란교회·광림교회·충현교회 등의 세습 논란과 잇따른 목사 비리 파문 등도 영향을 미쳤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성 교단이 주로 잠식한 대상 역시 개신교였다.

 

2004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를 거쳐간 이탈자 수가 758만 명으로 추산됐고 이들 가운데 다른 종교로 개종한 수는 198만 명에 이르렀다. 2005년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이단종파 150여 개로 200만~300만 명이 이단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위기는 오히려 교회의 보수화를 부채질했다. 대형교회 의존도가 심해진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우리나라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외국 선교단체의 지원이 끊긴 탓도 있었지만 교회 전반에 물신주의가 팽배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보수교단 일각에서는 정치 참여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그동안 차별금지법과 종교인 과세 등 입법 과정이나 주요 선거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원이나 후원 등 간접 참여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2004년 한국기독당과 국민복지당 창당을 시작으로 기독사랑실천당, 기독자유민주당, 통일기독당, 기독당, 기독자유당 등의 개신교계 정당이 명멸했으나 지금까지 국회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전광훈 목사(사랑제일교회)가 이끄는 자유통일당은 2016년 3월 기독자유당이란 이름으로 창당한 것이 모체이다.

 

2007년 12월 소망교회 장로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만 해도 김진홍 등 뉴라이트 계열 목사들과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우리가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그러나 정권 내내 종교 편향 논란이 끊이지 않아 오히려 일반인에게 개신교 염증을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중국은 왜 극우 개신교의 주적이 됐을까

 

개신교인들이 이른바 태극기 집회의 주력 부대로 나선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부터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세력은 크지 않았고 본격적인 극우 성향을 띠지도 않았다. 극우 개신교라는 변종이 탄생한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였다. 이들은 북한, 이슬람, 동성애자라는 기존의 주적들 외에 중국을 추가했다. 북한의 남침이나 한반도 공산화 등을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이 줄어들다 보니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하며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인 것이다.

 

조선족(중국계 동포)을 비롯한 중국인의 대거 이주,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보이스피싱 등의 범죄 개입 사례 등에다가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쳐 중국 혐오 현상이 급증한 틈을 파고들었다. 취업난이나 경제 양극화 등도 한몫했다. 주한 중국인들이 세금이나 대출이나 대학 입학 등 수십 가지나 되는 엄청난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등의 근거 없는 괴담이 떠돌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서울 중구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반중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5.2.7. 연합

 

이들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 국면을 맞아 “중국 해커들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 “탄핵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가운데 중국 공안(公安)들이 섞여 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이 중국인이다” 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하며 중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한편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홍콩처럼 되는 건 시간 문제”라며 그를 악마화하고 있다.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한 것은 한기총 회장 출신의 전광훈(사랑제일교회)과 손현보(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등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대부분 대형교회가 이들을 후원하고 있고, 목사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신도가 적지 않다.

 

극우 개신교의 주장은 단순하다.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반공주의와 기복주의에 기반해 선악을 분명하게 가른다. 미국과 일본은 선이고 북한과 중국은 악이다. 개신교는 선이고 이슬람과 불교 등 다른 종교는 모두 악이다. 동성애는 악이고 이를 용인하는 집단도 악이다. 악은 사탄의 무리이므로 타도의 대상이지 포용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논리가 정치적으로 적용되면 파시즘 형태를 띤다.

 

이러한 흑백 논리에는 모순과 오류가 따른다. 성경적이지도 않고 상식이나 합리에도 어긋나는데도 추호의 의심도 없을 만큼 맹목적이다. 그래서 집회에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나오면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가 손바닥에 왕(王)자를 적은 채 TV토론에 나오고 무속이 국정에 개입하는데도 적(이재명)의 적인 윤 대통령은 우리 편이어서 모든 것이 용서된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에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나와 흔들고 있다.

 

“확신은 통합과 포용의 치명적인 적”

 

내란 수사가 본격화하고 새 대통령 취임 이후 국정이 정상화하면 극우 개신교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전광훈과 손현보가 갈라섰고, 헌재의 탄핵 결정 이후 집회 참가자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애국 활동 후원을 빙자한 전광훈 가족의 치부 의혹도 속속 폭로되고 있다.

 

손현보(왼쪽)와 전광훈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에 남긴 상처는 크고 깊다. 처절한 회개와 반성, 뼈를 깎는 개혁 등이 수반돼야 하지만 지금의 대형교회와 보수교단이 이를 실천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극우 개신교라는 괴물을 낳은 한국 교회의 뿌리가 워낙 깊고 질기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해 화제를 모은 영화 ‘콘클라베’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극우 개신교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예수님도 종국에는 확신을 두려워하시지 않았던가요?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신앙이 살아 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앙도 필요가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