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트럼프' 만든 MAGA 음모론, 트럼프에 부메랑

● WORLD 2025. 7. 16. 13:3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엡스타인 리스트 없다?…'믿었던' 트럼프 너마저

관세 폭력‧공포 정치, 성범죄 사건에 발목 잡혀
MAGA 지지층 균열…내년 중간선거 비상

CNN "트럼프는 음모론의 최대 수혜자"
법무장관 사퇴, 특검 전면 재조사 요구

 

밖으론 전방위적 관세 폭력을 휘두르고 안으론 군까지 동원한 이민자 단속 등 '공포 정치'에 거침이 없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때아닌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에 발목이 잡혔다.

 

문제의 중심엔 아동 성범죄자 엡스타인의 이른바 '고객 리스트'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과정 내내 "엡스타인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론대에서 열린 제1회 펜실베이니아 에너지 및 혁신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5. 07. 15 [AFP=연합]
 

'오늘의 트럼프' 만든 음모론 부메랑으로

 

그러나 트럼프가 임명한 팸 본디 법무부 장관과 캐시 파텔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지난 7일 공동성명을 통해 "엡스타인 리스트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철저한 검토 끝에 고객 리스트나 협박 증거, 타살 증거가 없다"라고 이전의 수사 결과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앞서 본디 장관은 올해 2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리스트'와 관련해 "내 책상 위에 있다"라고 밝힌 터라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등 트럼프 극렬 지지층의 거센 반발을 샀다. 뒤늦게 당시 언급한 건 '고객 리스트'가 아닌 "사건 관련 문건"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미국의 억만장자 금융가인 엡스타인은 2019년 최대 40년과 5년 형에 각각 처할 미성년자 성매매와 성매매 공모 혐의로 연방 법원에 기소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2002년~2005년 최소 40명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 착취를 자행했다. 그해 7월 초 뉴욕 맨해튼 법원의 보석 없는 구금 결정을 받은 그는 그달 말 구치소에서 의식을 반쯤 잃은 채 발견됐다가 얼마 후 사망했다. 여자친구이자 모집책인 기슬레인 맥스웰은 2021년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14일 일론 머스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두 사람은 그러나 5일 서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며 결별했다. 이날 하루 미국 언론을 달군 최대 이슈였다. 2025.6.5. AFP 연합
 

엡스타인 리스트 없다?…트럼프 너마저

 

2019년 당시 수사 당국은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동성범죄에 정·재계 등 유력 인사들이 연루됐고 이들의 이름이 담긴 '엡스타인 리스트'가 존재하며 그 때문에 엡스타인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특히 MAGA 등 극우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졌다.

 

뉴욕타임스는 14일 "세부 내용은 인플루언서마다 다르지만, 언제나 일반적 생각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카르텔이 존재하고 그들을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프렌치는 "MAGA 진영에서 엡스타인 스토리는 소위 미국 지배층을 기소하는 데서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매우 중시됐다"라고 논평했다. 특히 트럼프와 가까운 극우 인사들인 스티브 배넌, 로라 루머는 물론 본디 장관이나 FBI의 파텔 국장, 댄 본지노 부국장도 과거에 권력형 부패를 폭로할 핵심 열쇠라면서 엡스타인 리스트의 존재를 주장했다.

 

트럼프의 강력한 정치 기반으로 엡스타인 사건의 실체 규명을 외쳐온 MAGA 지지자들은 법무부와 FBI의 이번 발표를 '배신'으로 규정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약속 번복과 은폐의 책임을 물어 트럼프의 최측근 중 하나인 본디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배넌과 루머는 특별검사 임명을 요구하며 엡스타인 사건 전면 재조사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폴리티코는 "트럼프 대통령이 급속도로 확산하는 MAGA 지지자들의 반발에 직면했다"며 "트럼프의 일부 측근조차 이번 사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팸 본디 미국 법무장관이 27일 백악관의 프레스 브리핑룸에서 발언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곁에서 듣고 있다. 2025. 06. 27 [로이터=연합]
 

법무장관 사퇴, 특검 전면 재조사 요구

 

트럼프는 본디 장관을 감싸며 진화에 나섰다. 8일 본디에게 관련 질문을 하려는 백악관 기자에게 "텍사스에서 일어난 일로 비극을 겪는 이 시기에 엡스타인 질문을 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신성모독과도 같다"고 쏘아붙이는가 하면, 13일엔 자신의 트루스 소셜을 통해 "옛날 동일한 급진 좌파가 부추긴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문건들을 보는데 몇 달이고 계속 허송할 게 아니라. 팸 본디가 자기 할 일을 하게 하자. 그는 대단하다!"라고 두둔했다. 그러면서 본디와 FBI에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2020년 대선이 "조작되고 도둑맞았다"며 수사 지시를 통해 이슈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MAGA 인플루언서인 루머는 "트럼프에 투표했던 사람들은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지지층은 불만에 가득 차 있다"고 말했고, 트럼프 지지 팟캐스트 '워룸'의 내털리 윈터스는 "사람들은 대놓고 무시한 데 정말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단체 터닝포인트USA 행사에서 전 폭스뉴스 앵커인 메긴 켈리는 본디를 "이번 스토리의 악당"이라 비난했다. 또한 FBI의 파텔과 본지노가 본디의 대응에 반발해 사퇴를 고려 중이란 보도도 나왔다.

 

역설적 대목은 '오늘의 트럼프'를 만든 MAGA의 음모론이 이제 트럼프 본인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다. CNN은 "과거의 트럼프는 음모론의 최대 수혜자였다"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 관련 '버서리즘'(birtherism)'은 그의 정치 경력의 출발점이었다"고 지적했다. 그 후 등장한 극우 음모론 큐어넌(QAnon)'은 트럼프가 민주당 엘리트 아동성범죄 집단과 비밀리에 싸우고 있다고 믿었고, 엡스타인 관련 음모론은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게 CNN의 분석이다.

 

트럼프와 엡스타인이 함께 어울린 사진들 - 출처: X 

 

CNN "트럼프는 음모론의 최대 수혜자"

 

이 대목에서 트럼프가 엡스타인 리스트에 있느냐는 의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트럼프는 1990년대부터 엡스타인과 친하게 지냈다. 각종 파티에서 엡스타인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있다. 2002년 뉴욕매거진 인터뷰에선 엡스타인을 "아름다운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엡스타인의 주소록과 비행기 승객 명단에도 들어 있었다.

 

지금은 결별한 일론 머스크가 지난달엔 자신의 X를 통해 "진짜 폭탄은 이거다. 트럼프가 엡스타인 파일에 있다. 그래서 파일이 공개되지 않는 것"이라고 올렸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뉴욕타임스와 폴리티코, CNN 등 미국 언론은 음모론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극우 MAGA 세력이 자기 발등을 찍은 것에 비유하면서 트럼프의 리더십 약화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면서 내년 중간선거와 2028년 대선을 앞두고 핵심 MAGA 지지층의 이반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CNN는 "트럼프가 조사 결과를 옹호하면서 상황은 그와 그가 만든 운동(MAGA) 간에 유례없는 충성도 시험을 촉발했다"며 "트럼프는 오랫동안 지지층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왔지만, 이번 상황은 그의 운동(MAGA)이 지도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첫 사례이며 아마도 '포스트-트럼프' 시대에 MAGA가 어떻게 진화할지를 보여주는 초기 청사진이다"라고 풀이했다.  < 이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