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감추고 정쟁만 요란하게 떠드는 ‘국민의 방송’

                                                                            송요훈 편집위원(전 MBC 기자)

 

오래전의 일이다. 휴일에 북한산을 오르다 너른 바위와 소나무 사이로 널찍한 평지가 있는 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배가 있어 보이는 몇몇 사내들이 막걸리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었고 그중의 한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굳이 국립공원이 아니라도 산에서 금연은 상식이다. 잠시 후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이가 다가가 산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호통을 쳤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주위의 눈총을 의식해서 그랬는지 당황하여 담배를 끄고 뭐라고 변명하는 듯하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담배를 피운 건 잘못이지만 당신이 뭔데 야단을 치느냐, 왜 반말이냐’ 하며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고, 몇 차례 고성이 오고 간 뒤에는 산에서의 흡연이 아니라 나이 좀 많다고 반말을 했다는 게 싸움의 본질이 되어 버렸다.

 

‘내란 정당’의 억지를 날카로운 창으로 둔갑시킨 9시 뉴스

 

윤석열이 저지른 한밤중의 계엄 난동으로 여당이던 국민의힘은 졸지에 ‘내란 정당’의 낙인이 찍히고 선거에 패배하여 야당이 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국힘당은 국정감사에서 이재명 정권의 총체적 무능과 실정을 밝히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KBS 9시 뉴스는 보도했다. 고물가, 수도권 집값 폭등, 한미 관세협상 교착에서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에서 벌어진 한국 노동자 집단 구금과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범죄조직의 한국인 감금까지 모두 이재명 정부의 실정이라는 거다.

 

KBS 뉴스 화면 캡쳐 모음

 

사람 몸의 병도 그렇지만 나라의 병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고 고작 넉 달이 지났을 뿐이다. 나라에 병이 있다면 윤석열이 대통령이고 국힘당이 여당이던 시절에 발원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집권당으로서 윤석열의 내란을 방조한 책임이 있으니 야당이지만 날카로운 창이 아니라 방패가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KBS 뉴스는 국힘당의 주장을 그대로 전하며 국감에서 양보 없는 대치가 예상된단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그런 게 아닌 척 발뺌하며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을 힐난하는 말이다. 그런 수작이 통하여 위기를 모면하면 학습효과가 되어 도둑이 매를 들고 설치는 적반하장으로 발전한다. 그럴 때의 ‘공정한 보도’는 양쪽의 주장을 반반씩 전하는 기계적 균형이 아니라 공평무사한 자세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거다.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에도 그것이 언론 본연의 역할이라고 쓰여 있다.

 

‘공방’ ‘고성에 욕설’ ‘설전’ ‘충돌’에 사라진 시시비비

 

KBS 9시 뉴스는 국정감사 첫날 여야가 거세게 충돌했고, 공방이 이어졌고, 고성에 욕설이 오갔다고 전했다. 대법원 국감에서는 인사말만 하고 떠나려는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이른바 ‘희대의 파기환송’에 대해 질의를 하려는 여당과 못하게 하려는 야당이 고성으로 맞섰고, 국방부 국감에서는 ‘내란’이라는 용어를 쓰는 문제로 여야가 고성에 욕설까지 오가는 공방을 벌였고, 외교부 국감에서는 한미 관세 협상을 놓고 여당은 정부의 외교 협상력을 높여주려 했고 야당은 ‘완전 폭망 상태’라고 평가했다며 양쪽의 주장을 반반씩 전했다.

 

KBS 뉴스9 국정감사 첫날 보도 화면 캡쳐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국감장 곳곳에서 여야가 충돌했고, 고성과 설전이 이어졌고, 주장하면 반박하고 제기하면 반발하는 말싸움 공방이 벌어졌고, 여야 대치가 이어졌고, 공방이 뜨거웠고, 여야가 맞붙었다는 ‘공방전 국감’ 소식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동어 반복으로 전했다. 무릇 국정감사란 납세자인 국민이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주권자 국민이 위임한 권한이 바르게 행사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따져보는 것인데, 준조세인 수신료로 운영되는 ‘국민의 방송’ KBS 뉴스는 국정감사장 문턱에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쪽과 진실을 가리려는 쪽이 거칠게 싸우는 장면만 공평하게 반반씩 전하고 있었다.

 

달을 보라는데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에 때가 묻었다고 트집을 잡는 건, 시선을 돌리게 하여 문제의 원인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거다. 소란을 피우고 흙탕물을 일으키는 건, 문제의 본질을 숨기려는 거다. 잘못한 게 많아 숨길 게 많은 쪽이 괜한 트집을 잡고 소란을 피운다. 그래야 진실이 가려지므로. 대개의 정치 공방이 그러하다. 기자들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여야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반반씩 보도한다. 억지와 궤변일지라도 그대로 옮긴다. 일방적인 주장이나 의혹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보도하는 것이 기본적인 언론 윤리인데 공영방송 KBS에서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KBS 보기에 국힘당과 조희대는 사법부 독립의 수호천사?

 

이번 국정감사에서 가장 관심이 쏠린 건 대법원 국감이었다. 대법원이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고 2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 이재명 선거법 사건에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건, 이재명의 대선 출마를 봉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의심은 해소는커녕 오히려 증폭되고 있고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은 상황이니 대법원 국감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대법원 국감에선 형사사건은 종이 기록으로 심리를 해야 한다는 대법원 규정이 있음에도 이재명 선거법 사건의 경우 그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KBS 9시 뉴스는 흙탕물 공방전을 반반씩 충실하게 전했을 뿐 ‘종이 기록을 보지 않았다’는 새로운 쟁점은 보도하지 않았다. 외관은 반반의 기계적 균형을 취하고 있었지만, 흙탕물 보도는 진실을 가리고 있었고 KBS 뉴스의 무게추는 국힘당과 조희대 대법원장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3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여야 의원들의 설전을 지켜보다 눈을 감고 있다. 2025.10.13. 연합
 

한동훈 전 국힘당 대표는 ‘화장실 가서 휴지 말고 비데 사용하면 무효이고 무죄인가’ 하며 민주당이 억지를 부린다는 글을 페북에 올렸다. 그런데 틀렸다. 지금의 논점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가 아니다. 흑묘도 백묘도 없다는 거다.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고, 비데는 있으나 수도계량기의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 엉덩이를 까보자는 말까지 나오는 건데,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지 겁이 나서 그러는지 ‘사법부 독립’을 호신용 방패 삼아 장두노미의 행태를 고집하고 있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자기 손으로 재판의 신뢰와 법원의 권위를 허물고 있는데도 ‘국민의 방송’ KBS는 그런 대법원장을 비판하지 않는다. KBS 보도는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다. 억지든 궤변이든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반반씩 무비판으로 전달하는 기계적 균형에 충실한 보도를 반복하더니 ‘국회의 품격이 이렇게 떨어졌나’, ‘거듭된 파행에 정책·민생 국감 실종이란 비판은 올해도 피할 수 없게 됐다’며 전가의 보도인 양비론 칼을 꺼내 들어 여야를 싸잡아 비난한다. KBS 뉴스를 보면, 조희대 대법원장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졸지에 봉변을 당한 피해자이고 야당인 국힘당은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수호천사이고 여당인 민주당은 사법부의 독립을 위협하는 악마다. 공방전 중계 보도에선 본말전도, 주객전도가 일상이다.

 

KBS 독립시킨 건 민주당, 장악한 건 윤석열 아니었나

 

KBS는 정치 뉴스만 기계적 중립과 양비론으로 보도하는 게 아니다. 부동산 뉴스도 그랬다. 집값 상승이 심상찮은 양상을 보이자 정부는 서울 전역과 경기도 12곳을 토지거래구역으로 지정하고 갭투자를 금지하는 등 고강도 대책을 발표했는데, KBS는 며칠에 걸쳐 ‘시장 혼란’, ‘실수요자 막막함 토로’, ‘내 집 마련 꿈만 빼앗을 것’, ‘시장에선 전세 품귀 우려’, ‘전세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전망’ 등 집 없는 서민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는 보도를 쏟아냈고, ‘부동산 테러’, ‘좌파 정권 20년 부동산 정책 실패의 재탕’이라는 야당의 막말을 여야 공방전 보도로 중계하였다. KBS는 진정 집 없는 서민들을 걱정해서 그런 보도를 하는 건지, 이재명 정부를 흔들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KBS 보도 화면 캡쳐

 

시시비비를 외면한 KBS의 보도 행태는 국힘당 장동혁 대표의 윤석열 면회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장동혁 국힘당 대표가 구치소를 찾아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면회했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성경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국힘당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고, 조중동마저 ‘민심은 안중에 없냐’ ‘대단히 부적절하다, 대체 어쩌자는 거냐’며 혀를 끌끌 차는 사설을 실었지만, ‘국민의 방송’ KBS는 별일 아니라는 듯 넉 줄짜리 단신 기사에 민주당 반응까지 끼워 넣은 정치 공방으로 짧게 보도했다. KBS는 왜 장동혁 대표의 윤석열 면회를 ‘축소 보도’한 걸까?

 

KBS는 준조세인 수신료로 운영된다. 윤석열 정권은 수신료 분리 징수로 KBS의 목줄을 죄고 ‘국민의 방송’ KBS를 ‘정권의 방송’으로 길들이려 하였다. 윤석열이 투하한 낙하산 사장은 입맛에 맞지 않는 기자와 PD들을 수신료 징수원으로 내쫓았다. 윤석열 정권이 막무가내로 추진하던 KBS 수신료 분리 징수에 제동을 걸고 통합 징수로 법제화하여 공영방송 KBS의 재정 기반을 안정되게 한 건 여당이던 국힘당이 아니라 야당이던 민주당이었다. 윤석열은 KBS를 장악하려 했고, 민주당은 KBS를 독립시키려 했다.

 

‘쬐끄만 백’ 덕분에 사장 자리 꿰찬 박장범 사장

 

지금 KBS 사장은 ‘파우치 박’이란 별명을 가진 박장범 사장이다. KBS 9시 뉴스 앵커였던 그는 대통령 윤석열과 대담을 진행하면서 김건희가 받은 명품백을 명품백이라 하지 못하고 ‘외국회사의 쬐끄만 백’이라 했고, ‘선물로 주었다’고 하지 못하고 ‘앞에 두고 왔다’고 둘러댔었다. 외람되어 그랬을 것이다. 권력 앞에서 비루하던 그 앵커는 결국 KBS 사장이 되었다. KBS 9시 뉴스는 그가 내년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공영방송총회의 의장에 선임되었으며 공영방송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공유하겠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파우치 박’이란 별명을 가진 그가 말하는 성공모델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박장범 뉴스9 앵커와 윤석열 대담 화면 캡쳐

 

한국기자협회의 언론윤리헌장은 언론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정확한 보도’와 ‘공정한 보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진실 추구는 언론의 존재 이유다. 사실을 부정하고 믿고 싶은 바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시대에 진실 추구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윤리적 언론은 정확한 사실을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맥락으로 전달한다. 정확성은 신속성에 우선한다. 모든 정보를 성실하게 검증하고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보도한다. 윤리적 언론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의 경중을 고려해 보도 내용의 양적·질적 균형을 맞춘다. 특정한 가치와 정파적 이익에 부합하는 사실과 견해만을 선택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프레스센터 앞에 설치된 '굽히지 않는 펜'

 

수신료 내는 맛 느낄 수 있는 ‘국민의 방송’ 되어야

 

인터넷에 접속하면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정보들이 쏟아진다. 조회수 높이는 알고리즘을 타고 가짜뉴스가 확산되면서 갈수록 확증편향은 강화되고 여론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기계적 균형과 양비론 보도가 단지 KBS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굳이 KBS 뉴스를 언급하는 이유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국민의 방송’ KBS만이라도 언론 윤리에 충실한 보도를 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KBS 보도가 팩트 체크의 기준점이 되고 다른 매체들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적은 액수이긴 하지만, 수신료의 가치를 KBS 뉴스가 보여주기를 바란다. 수신료 내는 맛을 느끼게 해주기를 바란다. KBS의 다음 사장은 권력이 아닌 시민의 손으로 뽑을 수 있도록 ‘파우치 박’ 사장은 속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이 내란 우두머리에게 장악되었던 KBS가 ‘국민의 방송’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정상화의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