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영남씨가 2010년 자신의 집에서 시인 이상과 관련해 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기죄로 보기 어렵다” 항소심 판단 확정
무명화가의 도움을 받은 화투 그림을 자신의 창작물로 판매했다가 재판에 넘겨진 가수 조영남씨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5일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로 판결을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검찰은 조씨가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송아무개씨 등에게 그림 대작을 지시했고 그렇게 넘겨받은 그림에 자신의 서명 등 경미한 작업만을 추가해 비싼 값에 판매(21점 1억5300만원)한 행위가 사기에 해당한다며 조씨를 기소했다.
1심은 “조씨의 창작물로 볼 수 없으며 이를 구매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은 사기”라며 유죄를 선고(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했지만 항소심은 “조씨의 친작 여부가 구매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항소심 판단이 옳다며 조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 김태규 기자 >
대법 “전문가 의견 존중하는 ‘사법 자제의 원칙’ 우선”
미술계서도 “작가·평론가가 논쟁해야 할 영역일 뿐”
유명 작가가 조수를 시켜 자신의 구상이 들어간 그림을 대신 그리게 했다. 그리고 자기 작품이라고 과시하며 팔았다. 이런 대작(代作) 행위는 창작일까, 사기일까. 그림 팔 때 이런 사실도 알려줘야 할까.
서구 미술판에서는 작가·평론가가 입씨름하며 풀어야 할 사안으로 여기는 이 문제에 대해 한국 대법원이 25일 공식 결론을 냈다. 직업을 “가수와 화가를 겸한 화수(畵手)”라고 표현하며 ‘화투’를 소재로 지난 20여년간 팝아트 작업을 해온 가수 조영남(75)씨의 대작 기소 사건 상고심(3심) 판결에서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사기혐의를 받아온 조씨에 대해 무죄라고 최종 판결하며 4년여에 걸친 재판을 마무리했다. 판결문의 한 글귀가 핵심을 찌른다. “미술품 위작 여부나 저작권 다툼 등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한 작품의 가치 평가는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 사건은 2011~2015년 조씨가 특유의 화투짝 그림 이미지를 무명 화가 ㅅ씨에게 대신 그리게 하고 자기 작품이라며 컬렉터들에게 팔아 1억5천여만원을 챙긴 사실이 2016년 5월 검찰 수사로 드러나면서 불거졌다. 조씨는 대작 화가에게 화투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자신은 일부 덧칠만 해 20여점을 팔았다. 조수를 썼다는 사실을 고지하지 않고 억대 수입을 올린 것을 검찰은 문제 삼았다. 조씨는 2016년 사기죄로 기소됐고, 그 뒤로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검찰은 조씨가 자신의 창작품이 아닌데도 사기 의도를 갖고 컬렉터를 속였다고 의심했고, 조씨는 팝아트 등 현대사조 작가들이 자기 아이디어를 담은 작업을 조수에게 시키는 것은 관행이라고 항변했다. 미학자 진중권씨는 “작품 제작에 조수를 쓰고 말고는 담론의 영역이지 사법당국이 재단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조씨를 거들었고, 한국전업작가협회 소속 작가들, 화랑주들도 각기 찬반 의견을 내어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달아올랐다.
2017년 1심 판결은 ‘유죄’였다. 법원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림 작업을 주도한 이가 대작 작가였다는 사실은 작품 거래 과정에서 가치 있는 정보인데, 사전에 알리지 않아 구매자를 속였다”며 사기 혐의를 인정한 것이다. 반면, 조씨가 항소해 이듬해 나온 2심 판결은 ‘무죄’였다. “그림 핵심은 조씨의 아이디어고, 대작 작가는 기술 보조에 불과하며, 조씨가 홀로 모든 그림을 그렸다는 ‘친작’(親作) 여부를 중요한 구매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대법원은 최종 판결에서 ‘사법 자제’ 원칙을 강조하며 2심 판단에 손을 들어줬다. 구매자들은 ‘조씨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그림을 샀으므로, 반드시 조수가 그렸다는 사실을 고지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조씨의 작품을 ‘친작’으로 잘못 알고 샀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미술품 거래의 경우, 법률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과 관행을 우선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대법원은 판결을 앞두고 지난달 28일 이례적으로 공개변론 자리도 마련했다. 현대미술에서 조수를 써서 작업한 것을 작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이를 어느 범위까지 고지해야 하는지를 놓고 조씨의 증인, 변호인과 검찰 쪽, 전업작가 증인 사이에 공방이 벌어졌다. 하지만 검찰 쪽이 기소를 유지할 만큼 설득력 있는 내용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번 판결은 미술계에 큰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조씨가 혐의를 벗으면서, 작가의 독창적인 발상이 인정되면 실제 작업은 다른 이가 해도 자신의 작품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판례가 처음 세워졌기 때문이다. 조씨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법적으로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따지는 근성이 있다”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던 판결이 처음 나온 것으로 현대미술이 살아있음을 알린 측면이 있고, 전공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작업할 수 있는 미술의 자유로운 속성을 밝힌 것도 의미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이란 책을 다음 주 출간하며, 조만간 신작 전시회도 재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미술계에서는 “당연한 결과”라면서도 우려의 목소리도 일부 나온다. 연예인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화랑 등 미술 자본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될 뿐 질적 수준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아이디어의 독창성이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당연한 판결이지만, 연예인 작가들이 작품성에 대한 성찰 없이 작업하는 관행을 키울까 봐 걱정이 된다. 홀로 화풍을 닦아온 전업작가들은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 노형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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