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피해자 3명에 배상 판결, 김명수 대법 새 판례낼지 주목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통치행위라는 이유로 국가의 배상 책임 범위를 크게 좁힌 양승태 대법원의 판단을 정면으로 반박한 첫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상고심 심리 과정에서 대법원이 새로운 판례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서울고법 민사5(재판장 김형두)긴급조치 선포와 그에 따른 수사 및 재판, 형의 집행 등에서 불법성의 핵심은 긴급조치 자체라며 수사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입증되지 않더라도 국가는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한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유신헌법 철폐 시위 등에 참가해 긴급조치 1·9호를 위반한 혐의로 구금된 피해자 김아무개씨 등 3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다.

재판부는 긴급조치는 그 발령 당시부터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어서 국민 통제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 위법하다고 평가돼야 한다고 밝혔다. 긴급조치 발령과 그에 따른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후속조처는 모두 위법하다는 취지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가 위헌일지라도 이를 선포한 대통령의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통치행위라며 긴급조치 적용으로 인한 고문, 불법구금 등 형사절차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됐을 경우에만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또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이 긴급조치를 사법심사의 대상에서 제외한 점 등을 들어, 긴급조치 위반에 따른 공무원의 수사·재판 등 직무행위를 고의·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로도 보지 않았다.

피해자가 체포나 구금 과정에서 겪은 고문, 가혹행위 등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대부분 배상이 막혔던 이유다. 당시 작성된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긴급조치 사건이 정부 협조사례중 하나로 제시돼 사법농단 사태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엄격하게 요구한다면 국가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 조직적인 불법행위에 대해 오히려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줄어드는 부당한 결론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불법행위를 수행한 공무원을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다. “긴급조치에 따른 수사와 재판은 법률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측면이 크고 국가작용의 최하단에 있는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러한 불법의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지시한 기관에 대한 면책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공무원 과실의 인정 범위를 넓혀 국가배상청구권을 확대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항소심에서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인정함에 따라 정부가 상고하면 대법원에서도 양승태 판례를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2015년 대법원 판례가 나온 뒤에도 긴급조치 발령 자체를 불법으로 본 1심 판결이 종종 나왔지만 2심에서 기존 판례대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았다. 대법원까지 올라간 사건도 피해자들이 패소했거나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건된 뒤 수사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다투는 사건이 대부분이라 기존 판례를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에서 국가 책임을 제한하는 대법원 판례는 대부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생산됐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정부기관은 기존 판례에 의지해 상소를 남발했다. 최근에도 긴급조치 피해를 입은 고 장준하 선생의 유족들이 일부 승소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정부는 대법 판례에 반한다며 항소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이창복씨도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국가배상금을 가지급받았지만 대법원이 배상액을 대폭 줄여 수억원을 반납해야 할 처지에 몰렸고, 법원이 조정을 권고했지만 국가정보원은 응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과거사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전향적인 하급심 판결이 나오는 만큼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대법에서 긴급조치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하려는 움직임도 있는 것으로 안다법조계와 학계에서 법리적으로도 심층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기존 판례에 대한 반박 근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을 대리한 김형태 변호사도 사법농단 사태 이후에도 양승태 대법원 체제 하에서 나온 판결에 대한 논의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거의 자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이 김명수 대법원장이 있는 현 대법원의 과제일 것 같다고 말했다. < 장예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