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민심 풍랑위에 선 한국정치

● 칼럼 2011. 12. 4. 15:05 Posted by SisaHan
우리 정치구도를 언제까지 이대로 두고 봐야 하나. 엊그제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하는 것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지금 같은 정치구도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계속 후퇴하고, 경제·안보 주권은 미국에 떠넘긴 채 1%만을 위한 사회·경제 정책이 되풀이될 것이다.
이런 정치구도의 맨 꼭대기에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에도 특유의 불도저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이 협정문에 있는 수많은 독소 조항의 개정을 요구했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하며 일점일획도 고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미국의 재협상 요구는 들어주면서 국내의 간절한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이 대통령의 이런 행태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무려 22조원을 쏟아부어 4대강 사업을 2년여 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의 합리적인 비판에도 아예 귀를 닫았다. 오히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을 아전인수 식으로 끌어들여 4대강 사업을 자화자찬했다. 이제는 4대강 사업 경험을 해외에까지 수출하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다른 분야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우려되는 게 남북관계다. 이미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더 악화시키면 이를 복원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 또,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지는 와중에 대미 편향 외교를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국익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그런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아직도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다. 아마 임기 마지막 날까지 변함없이 ‘소신껏’ 일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이상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견제가 필요한 까닭이다. 내곡동 사저 문제로 이미 범법자 낙인이 찍혔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탄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야당의 견제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국민의 힘밖에 없다.
한나라당도 이번에 그 실체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청와대의 거수기 노릇은 않겠다던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하는 정당이 아니라 권력자와 소수 기득권 집단의 대변자임을 자인한 셈이다. 이제 그들이 아무리 쇄신을 얘기하고 대화를 한다고 해도 누가 믿겠는가.
그동안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국정운영이 가능하도록 충실히 뒷받침했다.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한다는 홍준표 대표는 이 대통령이 하라는 일을 착실히 수행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예산 의총을 한다며 의원들을 모두 모이도록 한 뒤 전격적으로 본회의장으로 몰아넣고 날치기를 강행하는 꼼수까지 부렸다. 전술적으로는 완벽한 작전이었는지 모르지만 집권여당 대표로서의 정도는 아니다.

협상파와 쇄신파의 행동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대부분의 협상파 의원들은 날치기에 동참했다. 쇄신이나 대화를 외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당명에 따라 거수기로 돌아가는 모습이 국민들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 공자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봉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쇄신파들이 조금이라도 그런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차라리 한나라당을 떠나는 게 낫다.
날치기 과정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의 한계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실리를 챙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명하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FTA무효화 투쟁에 나선다고 하지만 이대로는 더 이상 존속할 가치를 이미 잃었다. 야권통합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야당으로 거듭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번 FTA 비준안 날치기는 기존 정치구도의 정당성은 물론 생산성과 생명력마저 상실됐음을 보여준 전환기적인 사건이다. 정치권이 이를 계기로 자성하고 새판을 짜지 못한다면 결국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 강제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민심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민심이란 풍랑은 이미 저 깊은 곳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