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장 계 순
지난 8월에는 주말이 다섯 번이나 있었다.
그 반가운 휴일도 외출다운 외출을 못한 채 지나갔다. 마치 봄이 훌쩍 건너뛴 낯선 세상에서 여름을 맞이했던 것 같다. 분명 그곳에 있었을 텐데, 한창 벚꽃이 만발한 하이파크(High Park)에도 다녀갔을 아지랑이 봄날은 내 기억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다. 도시의 폐쇄(Lockdown)가 시작된 늦봄, 옅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이름 모를 우울이 몰려오곤 했다. 생명체도 아닌 COVID19이 창궐하던 계절 한가운데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확진자와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코로나에 전염된 시체를 거두어 들이는 냉장 트럭이 매일 질주한다는 뉴욕 거리를 상상하노라면 책 읽는 내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했다.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계절에 책을 읽은 들 무슨 소용인가, 내 일기장에도 회의에 찬 무력감이 묻어난다.
처음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두어 달 만에 세계적 유행병이 된 이후로 오직 세 단어만 무성했다.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자주 씻기. 어린이 놀이터에서부터 내가 즐겨 찾던 산행길 마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거의 다 닫혔다. 노마드적인 내게 갈 곳이 없어 졌다. 도심의 공원길을 찾아 나섰다.
모처럼 맑아진 공기와 새소리 냇물 소리에 갑갑했던 마음을 씻고 돌아오곤 했다.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경계의 빛으로 걷는 사람들에 비해 밀착한 채로 노니는 오리들이 부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 두기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 거리를 두다 보니 내 자신에 집중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런 만큼 상대방도 더 잘 보였다.
정상적인 삶이 뒤바뀐 그 계절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슬픔을 발견했다. 코로나에 전염된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딸의 통곡 소리에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코에 호스를 낀 아버지가 아이패드 화면을 통해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도 온통 슬픔이 배어 있었다. 서로 부둥켜 안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불현듯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리운 마음은 더 애절했을 거라고, ‘아름다운 슬픔’ 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그런 경황 가운데서도 나 우선이 아닌, 따뜻하게 내민 손길이 항상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독거 노인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젊은이들과 장애인들의 집집을 돌면서 식품을 배달해 주는 숨은 봉사자들… 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던 코로나였지만 이 아름다운 모습만은 앗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서로 양보하면서 타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코로나가 설 곳이 없을 거라는, 마침내 왕관을 벗고 시나브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계절이 올 것이란 믿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누구나 각자의 생애에서 한 번쯤은 빼앗긴 계절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전쟁터에 불려간 젊은이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로부터 학대받은 원주민이나, 어린 나이에 납치범에게 유괴당해서 유년 시절을 강탈당한 여인에 이르기까지…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운명적으로 자신의 계절을 빼앗긴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진리 아닌 진리를 전파하는 거짓 종교에 세뇌 당한 사람들 역시 생애의 중요한 계절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 또한 내 생애 절반을 타인의 시선에 구속당한 나 아닌 나로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우리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가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다. 즉, <좋든 나쁘든 고난과 역경까지도 받아들이라, 달라진 운명 앞에서 비관이나 증오에 앞서 삶의 주체인 ‘나’를 창조적으로 바꾸라, 고통, 상실 같은 불운을 탓하지 말라, 앞으로 나아갈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개념이다.이 바이러스로 인해 생계의 위협에 휘말린 사람들, 일상이 허무가 되어버린 계절을 맞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지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장미 넝쿨 아래 흐트러진 꽃잎에서 여름의 끝을 본다.그 어떤 비극적인 일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시대에 사는 현대인, 백신도 낫게 할 수 없는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amor fati “. 빼앗긴 계절에 연연치 말자. 이것 또한 지나 가리라…
< 장 계 순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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