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의대 재학중인 중남미 사회인류학자 정이나 박사 반박증언

다함께 생존할 권리 동등 보장30국 의사파견단 사명감과 명예

 

2018년 쿠바 아바나의대에 입학해 예과 1학년 과정을 마친 정이나 전 부산외대 교수가 지난 7월 귀국 전 교정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일찍이 피델(카스트로)이 이런 말을 했어요. ‘쿠바는 이웃 나라에 폭탄이 아니라 의사(하얀 가운의 부대)들을 보낸다.’ 그런데 최근 국내 한 언론에서 느닷없이 쿠바 공공의료의 다른 이름, 하얀 가운 노예들이란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어요. ‘사실 확인이나 당사자의 직접적인 대응이 쉽지 않은 외국 사례를 이용해 공공의료 강화 정책에 반발한 의사 파업을 옹호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편파·왜곡 보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라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지난 7일 대안사회를 모색하는 지식인집단 다른백년의 누리집에 공공의료가 못내 못마땅한, 조선일보의 볼썽사나운 기사의 진실’(http://thetomorrow.kr/archives/12784)이란 제목으로 반박 칼럼을 실은 정이나(43) 전 부산외대 교수는 사뭇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중남미 전공 사회인류학 박사이자 현재 쿠바 아바나의대 예과 1년 재학생으로, 누구보다 쿠바의 의료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귀국해 국내 머물고 있는 그에게 서 교수 자리까지 그만둔 채 쿠바에서 마흔 넘은 최고령 의학도로 변신한 이유를 들어봤다.

과테말라로 파견된 여의사가 매춘을 강요받는다는 이야기부터, 쿠바 의사들은 반드시 국외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사실, 의사 면허증을 반납하려고 하면 수년간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는 등, 거짓들로 채워진 기사였어요. ‘하얀 가운 노예들로 둔갑시킨 쿠바의 헨리 리브 국제의사파견단은 2005년 결성된 이래 재난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긴급의료를 지원한 공로로, 2017년 한국인 최초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낸 고 이종욱 박사를 기리는 이종욱 공공보건 기념상도 받았잖아요?”

이어 정 전 교수는 귀국 직전 아바나에서 직접 목격한 장면도 들려줬다. “이탈리아의 요청으로 파견됐던 약 52명의 의료진이 두 달간의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귀국하는 방송을 함께 지켜봤는데,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쿠바는 세계 30여개 나라에 의료진을 보낸 상태이기도 해요.”

실제로 쿠바의 코로나19 대처는 한국의 케이(K) 방역과 더불어 모범 사례로 꼽힌다. 지난 73일 현재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2400명 이하이고, 총 사망자는 86명으로, 주변국인 멕시코의 27분의 1, 브라질의 70분의 1에 불과하다.

쿠바 당국은 코로나 대유행 초기 가장 먼저 지역사회 중심의 공동행동을 시작했어요. 모든 의료진과 의대생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고, 노인과 감염 취약계층을 파악하는 특별전담의료진도 조직했어요. 이런 발빠른 대처의 목적은 다함께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것이죠. 쿠바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가 이처럼 확신하는 이유는 그 자신 쿠바 국제의사파견단의 혜택을 체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교 때부터 스페인어를 좋아해서 동시통역사를 꿈궜어요. 그래서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한 사립대학으로 유학을 갔죠. 그뒤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해 중남미 지역학 전공을 했는데 애초 기대와 많이 달라서 그만두고, 2004년 스페인 정부 장학금을 받아 북부도시에 있는 살라망카대학 석사과정에 다시 입학했어요. 2008년 박사과정 때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바리오(빈민 공동체)로 현지 조사를 나갔어요. 그때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고생했는데 때마침 쿠바의 국제의사파견단을 만나 무상으로 치료를 받아 무사히 논문을 쓸 수 있었죠. 무엇보다 파견 의사들이 명예로운 일을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어요.”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의료 국제연대는 2003년 차베스 정부가 추진한 바리오 아덴트로’(‘지역 속으로라는 뜻) 미션에 따라 시작해 지금도 2만여명의 쿠바 의료진이 도시 빈민촌과 농촌의 의료 사각지대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2년 베네수엘라의 현지 주민자치조직인 주민평의회 연구로 살라망카대학에서 사회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귀국해 고려대 연구교수를 거쳐 주과테말라 한국대사관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2014년 아버지의 별세로 돌아왔다가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자 한국에 정착했다. 그런데 2014년부터 부산외대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2018년 여름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년 가까이 베네수엘라·멕시코·과테말라·쿠바 등 중남미 지역을 대상으로 사회운동·계급투쟁·사회불평등·빈곤사회구조 등을 주로 연구해왔지만 관찰자이자 이방인의 시선으로 연구하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일종의 연구 슬럼프였죠. 쿠바의 의료 파견단처럼 실질적으로 현지인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능력을 키우고 싶었어요.”

아바나 의대에는 그를 포함해 모두 4명의 한국인이 유학중이다. “외국인 학비는 연간 1천만원 정도인데 중남미 지역 취약계층 장학생은 무상인 대신 사회봉사 의무가 있어요. 예방의학, 사회의학 중심이어서 학생과 교수·학생과 학생·학생과 지역 사이의 소통을 중시해요. 의대 1학년부터 수업 중에 폴리클리닉이라는 동네 종합병원이나 콘술토리오라는 지역진료소를 찾아가 매주 실습을 하고 있어요.”

정이나 박사가 지난 7월 귀국 직전 아바나 의대 예과 1년생 동기들과 지역진료소에서 코로나19 전수조사 활동을 하면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그는 귀국하기 직전 코로나19 지역감염 전수조사 활동 때 웃어라, 긴장하지 마라, 의사가 편안해 보어야 환자들도 안심한다면서 표정 관리까지 챙기던 담당 교수의 당부를 들으며 환자 우선의 인성 교육을 실감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세계은행 통계를 보면, 2018년 기준 쿠바의 인구 1천명당 의사 수는 8.4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다. 많은 의료진을 바탕으로 가족 주치의 제도를 둬서 1차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이 지역 내 담당 가정을 꾸준히 관리하면서 질병 예방과 건강 관리를 책임진다. 코로나19 확진자는 모두국가 격리센터에 수용해 치료하고 있다.

가족주치의제도에 따라 마을마다 진료소에 가면 늘 담당 주치의를 만날 수 있으니 코로나에도 주민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았어요. 의대 학생들 역시 엘리트나 고액 수입 같은 특권 의식은 없고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에 집중하면 되니까 안정적이죠. 이번 코로나 펜데믹의 본질은 바이러스라는 공공의 적으로부터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장 백신이 개발된다고 해도 특정 국가나 업체에서 고가에 독점 공급한다면, 대다수 일반인들에겐 그림의 떡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정 전 교수는 쿠바 공항이 열리는대로 현지로 돌아갈 예정이다. 하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의사자격증을 따는 게 아니다. “의술을 활용해 현지인과 실질적인 소통하면서 풀뿌리 사회운동을 함께하는 실천인류학자가 되고 싶어요.” < 김경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