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증 억제 증거 잇따라…기생충이 아토피, 관절염, 치매 막아줘

 

 장내 기생충은 더럽고 징그럽고 부끄러운 존재였지만 이제 노인질환을 막아 줄 해결사로 떠오르고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제공.

 

1960년대 기생충 박멸 사업이 전국적으로 벌어졌을 때 교과서에 실린 상피병 사진은 공포를 극대화했다. 인도 동부에 만연한 기생충인 사상충에 감염돼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오른 사람의 다리 사진이었다.

그러나 사상충은 사람을 괴롭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염증 관련 질병을 막아주기도 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앓는 이 지역 주민 207명 가운데 사상충에 감염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건강한 대조군의 222명 가운데 무려 40%가 이 기생충에 감염됐다.

 

사상충(위)과 사상충에 감염됐을 때 인체가 과잉반응해 림프부종을 일으킨 모습. 사상충이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브루스 장 등 (2021) ‘이 라이프’ 제공.

 

만성질환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려면 없던 기생충에 일부러 감염돼야 할지도 모른다. 브루스 장 등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대(UCL)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이 라이프’ 최근호에 실린 최근 연구 성과를 종합한 논문에서 “기생충이 없으면 류머티스성 관절염 등 염증 질환이 늘어난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다”며 “임상연구 결과는 기생충을 장내에 복원하는 치료법이 염증 관련 질환 억제에 효과적임을 잘 보여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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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 가설’

 

대변에 든 다양한 장내 기생충의 성체와 알 모습. 인류는 기생충과 함께 서로 적응하며 진화해 왔다. 일방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관계이다.

 

기생충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늘 함께한 ‘오랜 친구’여서 사람의 면역반응을 노련하게 조절해 살아가고 또 사람도 그다지 큰 해를 입지 않는다고 연구자들은 설명한다. 이른바 ‘오랜 친구 가설’이다.

사람의 면역체계는 더러운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하도록 진화했는데 함께 살던 미생물과 기생충을 제거하자 병적인 면역 과잉반응을 초래했다는 얘기다. 연구자들은 특히 기생충의 복원이 알레르기와 자가면역 질환뿐 아니라 노화와 관련한 염증을 막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최근 노인질환과 관련해 주목받는 ‘염증 노화’는 염증 유발인자와 억제인자 사이의 균형이 깨져 낮은 정도의 염증이 지속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병원체 감염과 무관하고 나이가 들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염증 노화는 심장질환, 치매, 암, 골다공증 등 노화와 관련한 다양한 질병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는데 최근에는 코로나19 감염 증상이 악화하는 데도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염증을 일으키는 원인은 장내 세균집단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는 장내 생태계를 이루는 큰 동물들 곧 흡충, 조충, 선충 등 기생충의 기여를 소홀히 다뤄왔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연구 결과 기생충 감소와 염증 질환의 관련성이 밝혀지고 있다. 천식, 아토피성 습진, 염증성 장 질환, 다발성 경화증, 류머티스성 관절염, 당뇨병 등에서 그런 연관이 드러났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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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분비물을 치료제로

그렇다면 기생충을 치료에 활용하는 길은 없을까. 기생충에 자연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감염돼 질병을 완화하거나 막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예를 들어 우간다의 임신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구충 감염이 아기의 아토피 습진을 막는 효과가 드러났지만 구충제를 먹은 임신부에서는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치료용으로 쓰일 기생충 후보인 편충. 브루스 장 등 (2021) ‘이 라이프’ 제공.

연구자들은 “염증을 억제하는 가장 비용이 덜 들고 효과적인 방법은 기생충에 지속적이고 낮은 수준으로 감염돼 있는 것”이라고 논문에 적었다. 그렇지만 기생충 감염으로 인한 안전성 문제(일부 기생충은 암을 일으킨다)와 심리적 거부감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생충에서 얻은 단백질을 치료에 쓰는 방법이 유력하다.

실제로 기생충의 분비물을 치료제로 활용하는 주목할 연구결과도 나왔다. 지난해 제니 크로우 영국 글래스고대 연구자 등은 선충의 단백질을 이용해 쥐의 항염증 반응을 일으켜 노화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데이비드 젬스 교수는 “말할 것도 없이 위생 향상과 기생충 박멸은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가져왔지만 면역 기능의 비정상화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며 “이제 기생충이 인류 특히 노령화 인구를 위해 무슨 혜택을 줄 수 있는지 찾아야 할 때”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한국사람 대부분이 감염됐던 기생충 회충의 모습.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제공.

한국에서는 1966년 기생충 질환 예방법이 제정되면서 전국적인 기생충 박멸사업이 시행됐다. 기생충학자들이 한국을 ‘기생충 왕국’이라 부를 정도로 감염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해방 뒤 실시한 조사에서 감염률은 회충 82.4%, 편충 81.1%, 구충 46.5% 수준이었다.

정준호 서울대 의대 교수의 2016년 대한의사학회지 논문 ‘1960년대 한국의 회충 감염의 사회사’를 보면 기생충 감염은 그 이전에도 일상적이었지만 더럽고 징그럽고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영조는 회충을 토한 뒤 이렇게 말한 것으로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회충은 사람과 함께하는 인룡이다. 천하게 여길 것이 없다.”   조홍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