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타고 장흥 석대들 전투 지휘… 23살 여성 선봉장 이소사
[3·8 여성의 날]에 재조명…진압군에 붙잡혀 모진고문 희생
박홍규 작가가 <1894 석대들>에 동학농민혁명 장흥 농민군 선봉장 이소사를 그린 삽화. 장흥문화공작소 제공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에 장흥에서 이소사라는 여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짤막하게 보도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 것이다.”
소설가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는 1990년 5월 <역사와 현장>(남풍) 1권에 쓴 ‘장흥지역 동학농민전쟁 관계 구전조사’라는 글에서 이소사(1874?~1895)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처음 언급했다. 결혼한 여성을 뜻하는 말인 소사(召史)는 이두식으론 ‘조이’라고 읽는다.
농민군 최후 항전지였던 장흥에서 구전하던 이소사의 행적이 적힌 기록을 처음 발굴·번역한 사람은 ‘향토 사학자’ 위의환씨다. 그는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집>(2006)을 발간하면서 <양호 우선봉 일기> 등에서 이소사 관련 3건의 기록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후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2009)와 <장흥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들>(2013)에 이소사의 기록이 처음 실렸다.
2016년 8월13일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전주시 중노송동 기린봉 들머리에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를 설치했다. 연합뉴스
<양호 우선봉 일기>는 ‘조선토벌군 우선봉장’ 이두황(1858~1916)이 쓴 4권짜리 군영일기로 여기서도 이소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뒤 조선토벌군 우선봉장으로 나섰던 친일 인물이다.
이두황은 1895년 1월1일 일본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에게 편지를 보낸다. 미나미가 12월27일 이두황에게 ‘이소사를 나주로 압송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소사는 농민군이 1894년 12월15일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한 뒤부터 12월26일 사이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거괴 체포자를 나주로 호송이 가능하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성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에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을 소모관 백낙중이 받았습니다.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돼 있었으며 교령을 받았을 때에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양호 우선봉 일기>)
미나미 고시로의 구술기록인 <동학당 정토(征討) 약기>가 실린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제6권에도 ‘여동학’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원본 갈무리
당시 일본 언론은 이소사에 관해 흥미 위주의 기사를 썼지만, 글 행간에 ‘진실’이 스며 있다.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3살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고쿠민신문> 1895년 3월5일치)
미나미의 구술기록인 <동학당 정토(征討) 약기>(<주한일본공사관기록> 제6권 중)에도 “그 여자가 압송돼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송장 상태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소사는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주에서 세상을 뜬 것으로 보인다.
이소사의 행적을 보도한 일본 <고쿠민신문> 1895년 3월5일치 기사. 박맹수 원광대 총장 제공
남녀차별이 심했던 19세기 말 봉건사회에서 이소사는 어떻게 농민군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박맹수 원광대 총장은 “1860년 출발한 동학이 ‘사람이 하늘이다’라며 양성평등 사상을 내걸었다는 점이 중요한 배경”이라고 말했다.
일본 신문은 이소사를 ‘미치광이’로 표현했다. “장흥 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명의 여자가 있는데 추천으로 수령이 됐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을 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됐다. 동학도가 귀신을 이야기하고 신을 말하는 것을 이용해 천사 혹은 천녀라 칭해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했다.”(<오사카 아사히신문> 1895년 4월7일치)
그러나 박 총장은 “‘미치광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그가 종교적 수련을 통해 일정한 경지에 올랐고 내부에서 상당한 위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농민군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보국안민 깃발을 든 이소사의 모습이 삽화(박홍규 작가)로 제작돼 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이소사는 항일·여성운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 그의 행적을 기록한 책들이 나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달 초 장흥문화공작소가 낸 <1894 석대들>에선 ‘장흥동학농민혁명 여성 선봉장’으로 이소사를 소개했다. 앞서 소설 <갑오의 여인, 이소사>(최혁·2014)와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록물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명금혜정·2015)에도 그가 등장했다. 문충선 장흥문화공작소 이사는 “강인하고 영특했던 여성 지도자로서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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