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배상 '각하' 재판부, 일 소송비용 추심도 불가 결정

대법원 판례를 1심서 잇달아 뒤집어 ... 판결문엔 외교문제까지 언급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이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까지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잇달아 제동이 걸리면서 피해자들의 시름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6년을 끈 끝에 이날 각하 판결을 내렸다.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같은 취지의 손해배상 소송을 원고 승소로 확정지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앞서 지난 4월에는 같은 법원 민사합의15부(민성철 부장판사)가 이용수 할머니와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2차 소송으로, 1차 소송의 피해자들이 지난 1월 일본 정부에 승소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정반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각하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과 법률적 의미는 다르지만, 청구가 인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같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1965년 한일 양국 정부간 체결한 청구권협정이 개인의 배상청구권에까지 적용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2차 소송은 일본에 '국가면제'(주권면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국가면제란 한 주권국가가 다른 나라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뜻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결론은 동일하다.

 

게다가 위안부 1차 소송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조차 실제로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소송에 철저히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도 걸림돌이지만 당초 배상 판결을 내린 재판부까지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1차 소송에서 승소한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한국 내 재산을 파악해 배상금을 추심하기 위해 올해 4월 재산 명시를 신청한 상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1차 소송에 패소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우리 정부가 소송비용을 추심할 수 없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려 논란을 낳고 있다.

 

소송비용은 일반적으로 패소한 측이 승소한 쪽에서 낼 금액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 사건의 경우 할머니들이 소송구조 제도를 이용해 소송이 끝날 때까지 비용 납부를 유예받은 상태여서, 절차대로라면 패소한 일본 정부가 할머니들의 소송비용을 우리 정부에 대신 물어야 하는데 법원에서 이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같은 추심 불가 결정을 내린 재판부는 다름 아닌 이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각하한 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다. 이 재판부는 앞서 지난 1월 위안부 1차 소송에서 배상 판결을 내린 뒤 재판장이 교체된 상태다.

 

이 재판부는 지난 4월 일본의 소송비용 추심을 면제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비엔나 협약 27조에 따라 위안부 합의 등 조약의 효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이번 강제징용 배상 각하 판결에서 한일 청구권협정을 내세워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3년 걸린 강제징용 대법 판결, 2년8개월만에 뒤집혀

 재판부, 2018년 당시 소수의견 추종…논란 확산할 듯

 갑자기 선고일 사흘 앞당겨…"법정 평온 · 안정 위해"

 "국제재판 패소하면 문명국 위신 추락" 표현도 논란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판결을 확정한 지 2년 8개월 만에 다시 이를 뒤집는 1심 판결이 나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7일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이는 앞서 2018년 10월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정면 배치된다.

 

법원 각하 결정에 '항소' 의견 밝히는 '강제징용' 피해자: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았다.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오른쪽)가 공판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소 의견을 밝히고 있다.

 

◇ 판례 세우는 데 13년 걸렸는데 2년 8개월 만에 뒤집어

재판부는 "이번 판결은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인 2018년 10월 30일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 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가 언급한 전원합의체 판결은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식 할아버지가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의 재상고심 판결로, 대법원은 "원고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하지만 당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제한되는 것으로 봐야 하므로 (일본 기업이 아닌) 대한민국이 피해자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의 의견이 재판부가 이날 각하 판결과 동일한 취지라고 언급한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 의견이다.

당시 사건 피해자들은 2005년 국내 법원에서 소송을 내 1·2심에서 패소했다가 2012년 대법원에서 승소 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고, 파기환송심을 거쳐 2018년 10월에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확정받았다.

 

이 확정 판결은 국내 법원에서만 13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지는 등 극심한 진통을 낳았다. 연합뉴스

 

징용손배 1심 “한강의 기적·문명국 위신” 이유로…대법 판례 역주행
       법조계 “대법 전합 소수의견을 그대로 따와…
       판사가 법리아닌 외교적 마찰 언급 부적절”
       피해자쪽 “언제까지 이렇게 울어야 하는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유족 임철호(왼쪽)씨와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가 공판이 끝난 뒤 법원을 빠져 나가고 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정규 씨는 일제 치하 당시 일본 나가사키로 강제 노역을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연합뉴스

 

법원이 7일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피해자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배상 판결을 확정한 지 2년8개월 만에 이를 뒤집는 하급심 판결이 나오면서 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한강의 기적’을 언급하고, 피해자가 승소하게 되면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이 우려된다는 취지의 표현을 기재한 점을 두고서도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뒤집은 하급심…“전합 판결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는 이날 강제노역 피해자 송아무개씨 등 85명이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해당한다”며 각하 이유를 밝혔다.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체결한 한·일 청구권협정에는 “두 나라와 그 국민 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돼 있다. 재판부 판단은 강제노역 피해자 개인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개인청구권 또한 이 협약에서 말하는 ’청구권‘에 포함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일본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다.

 

문제는 이런 판단이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의 다수의견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일본제철 강제노역 피해자 이춘식씨 등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전합은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국가 간 협정으로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며 피해자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 쟁점이었던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는지’를 두고 전합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며 피해자 쪽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관 7대6의 의견이었다. 다만, 소수의견(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날 사건 재판부도 전합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한 판단을 한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1심 재판부가 전합과 다른 판결을 내리면서 내놓은 논리가 빈약하다는 이유에서다.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 피해자 쪽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는 “하급심이 전합 판결과 다른 판결을 내놓을 수 있지만, 전합 판결을 반박할 수 있는 충분한 논리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매우 이례적으로 보인다. 전합 소수의견과 동일한 것으로 법리가 앙상하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 재판부는 전합 판결을 두고 도리어 “국내 최고재판소의 판결이지만,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어 이러한 판결은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어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 해석”이라며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이 인정한 자료가 없다. (중략)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이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일괄 보상하기로 합의한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제노역 판결문에 등장한 “한강의 기적”,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

재판부가 판결문에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외화 덕에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쓴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재판 과정에서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타결된 3억 달러는 과소하므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재판부가 “당시 낙후한 후진국 지위에 있던 대한민국과 이미 경제대국에 진입한 일본국 사이에 이뤄진 과거의 청구권협정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라며 “당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며 원고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한·일 관계가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식민지배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 한·일 청구권협정이 꼽히는 상황에서, 재판부는 이 협정으로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일 외교갈등을 우려하는 듯한 표현을 담은 것도 불필요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가 있다며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손해배상 책임을 거부하는 일본기업들에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의 국내 자산을 압류하는 등 강제집행 절차로 나갈 수 있는데, 이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에 해가 된다며 외교적 갈등상황을 우려하는 듯한 문구를 써넣은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전합 판결이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신뢰에 치명적 손상”,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썼다. 이어 “분단국이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대목도 담았다.

 

민변 “일본 보복 걱정에 법관 양심 저버려”…선고기일 당일 바꾼 것도 논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15개 시민단체는 이날 성명을 내어 “이 사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법원에서 최근 정립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에 대해 특별히 새로운 법리적 논거 없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는 점”이라며 “일본의 보복과 이로 인한 나라 걱정에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어 “이번 판결은 항소심에서 파기될 것으로 예상한다. 일본 정부가 만들어낸 현실에 굴복한 1심 재판부의 비상식적, 비법리적 판단은 중대한 비판을 받아야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피해자 쪽은 울분을 터트렸다. 장덕환 일제 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회장은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나 “재판 결과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며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울어야 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 쪽을 대리한 강길 변호사는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애초 이 사건 선고기일은 오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날 재판부가 갑자기 선고기일을 변경하면서 혼란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기일 변경으로 지방에 사는 피해자들 다수는 법원에 나오지 못했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고려해 판결선고기일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고령의 원고들이 다수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해명했다. 신민정 기자

 

강제징용 소송 각하 판결, 한-일 관계 변수 안될 듯

1심 판결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론 전면 부정
전문가들, 법원이 ‘외교’ 고려한 “이례적 판결”

 

정부가 7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 제동을 건 법원의 판결에 대해 한-일 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일본 정부와 협의를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판결에 대해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면서 “정부로서는 앞으로도 사법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 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데 대해 열린 입장으로 일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강제징용 피해자 송아무개씨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스미세키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모두 각하했다.

 

재판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2조)이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비엔나협약(27조)를 들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면서 청구권협정에 배치되는 발언이나 행위는 “국제법상 금반언의 원칙(禁反言·이미 표명한 자신의 언행에 대해 모순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비록 1심이지만 이는 2018년 10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위자료 청구권’이어서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3다61381)과 배치되는 결과여서 주목된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기업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이번 판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재판부가 ‘외교적 고려’를 한 부분이다. 재판부는 청구가 인용돼 강제집행까지 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 등까지 고려해 보면,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지난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뒤 일본 정부의 반발로 한-일 관계가 곤두박질쳤으며 지금껏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모양새다. 재판부는 설명자료에서 “(법원이)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위와 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여 이런 해석에 무게를 더했다.

 

이와 관련해 한-일 전후보상 소송에 오랫동안 참여해 온 이상희 변호사는“대통령과 외교부가 고민해야 할 일을 재판부가 한 것”이라며 “아주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날 판결 결과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그대로 따라 했다”며 “금반언이라는 일반 법리를 가지고 소를 각하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비판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도 “20년 전 일본 최고재판소가 판결했던 논의와 같다”면서도 “1심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항소하면 (사안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에서는 이번 판결이 한-일 관계에 특별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는 보지 않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오는 11~13일 영국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 또는 한미일 정상회의 추진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지만 “그럴 개연성은 적다”는 게 정부 관계자 설명이다.

 

정부에서는 이번 판결 자체가 한-일 관계 악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다는 점에서 다소 안도하는 모양새지만, 어차피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딱히 호재로 작용할 일도 아니라는 판단이다. 김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