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공존 · 공생은 숙명이다

● 칼럼 2021. 6. 27. 14:53 Posted by 시사 한겨레 ⓘ한마당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 공존·공생은 숙명이다 

 

지난 주 시사 한겨레 신문(15면)에 실린 ‘기적의 mRNA’기술‘은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mRNA 백신의 기적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새로운 하이테크 mRNA 의학은 수많은 중증질환을 치료할 잠재력이 있다. 에이즈, 독감, 결핵, 암, 다발성경화증, 류머티즘, 각종 알레르기, 위염, 알츠하이머, 낭포성섬유증, 무릎관절염, 척추디스크 등 온갖 질병에 대해 mRNA 기술을 이용한 치료법이 연구개발 중이다.』

 

독일 슈피겔지 기사를 소개하는 이 글에는 mRNA 기술의 발견과 COVID-19 백신 개발과정, 그리고 향후 만능 치료제로 발전해 ‘슈퍼 약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 그러면 어떤 놀라운 의료혁명이 일어날지를 전망하면서 ‘중증질환과 불치의 감염병에 대항할 신무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코로나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전염병들은 물론 현대의술로도 손쓸 수 없는 불치병들을 퇴치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지상천국이 도래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질병에 도전해온 발자취를 보면, 획기적인 의약품 개발이 대부분 발상의 전환, 혁신적 접근과 함께 오랜 고난을 견딘 과학자들의 도전과 실험정신의 산물들이다.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임을 증명해 의학의 새 시대를 연 ‘세균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는 어려서는 미술에, 대학에서는 화학을 공부한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는 고깃국물 오염이 자체 미생물 증식 때문이라는 당시의 통설을 뒤집고, 외부의 세균 때문이라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해 살균의학의 길을 열었다. 그의 역발상에서 나온 발견들은 이후 과학사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 뿐만 아니라 미시 세계에 대한 연구로 확장시켰다. 세균을 죽이는 항생제 개념도 그에게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알렉산더 플레밍에 의해 발견된 항생제의 원조 페니실린은 근 40년 동안 별다른 진척이 없다가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야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의 빛을 발했다.

생소한 생물과학 용어 ‘mRNA’, 즉 ‘전령 리보핵산’(messenger RiboNucleic Acid)은 핵산의 한 종류에서 일약 질병에 대항하는 신기원을 연다. 바이러스 단백질의 설계도를 암호화하는 mRNA를 만들어 해당 mRNA를 인체에 주입하면 인체는 자체 면역체계가 ‘낯설다’고 인지한 mRNA를 대량 만들어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기억을 형성해 방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백신은 기존 생균이나 죽은 균을 몸에 투여한 뒤 해당 세균과 싸워 이기도록 연습시켜 항체를 형성하는 방식인데, 에이즈나 뎅기열 등의 감염병에는 힘을 쓰지 못한다.

mRNA는 발상의 전환이었고, 그런 작동 메커니즘을 적용한 혁신적 백신이 발명되기까지는 오랜 시일 많은 과학자들이 시련과 실패을 거듭했다. 미국 유전학자 존 울프가 1990년 mRNA를 거론한 이후 10년 만에 코로나 사태에 직면해서야 백신이 응급 등장할 수 있었다.

효능이 뛰어난 획기적 백신과 치료제 개발은 질병에서 인류를 지키고 생존을 보장해주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지난 2년, 그리고 현재진행형 COVID-19 팬데믹은 백신이 만능일 수 없음도 보여주고 있다. ‘고성능’ mRNA 백신의 효능이 90~95%에 달한다는데 2차 완료자들의 돌파감염률이 25%를 오르내린다. 부스터 샷에, 상시적 접종을 해야 할 거라는 말도 나온다.

 

인간은 질병 정복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해나간다. 그러나 항생제 역사 백년도 안되는 사이에 수많은 항생제가 무력화되며 갈수록 초강력이 필요해지듯이, 교활한 변신과 신종 병원체들은 뛰는 인간 위에 나는 탁월한 존재들이다. 여전히 암이나 당뇨, 알츠하이머, 파킨슨 등 불치의 영역은 치유의 영토보다 넓다.

 

COVID-19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니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 자연은 인간 머리 위에 있으니 이기려 하지 말 것이며, 셋째는 공존과 공생의 지혜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전세계적인 코로나 몸살을 앓으며 양극화와 이념대립의 심화로 갈등과 분열도 극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숙명은 공존과 공생임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 죽고 나만 살기’를 고집한다면 자멸에서 공멸로 갈 뿐이다.

 

인간 몸의 세포는 30조개인데 비해 세균은 39조나 된다고 한다. 사실상 몸의 99%가 미생물이라는 수치도 있다. 공존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생태계를 교란·파괴하는 인간의 교만을 역습하는 독한 병원균의 발생과 변이를 따라잡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다. mRNA의 슈퍼약물이 나온다해도 다시 능가하는 엑스트라 슈퍼 바이러스가 등장하리라는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인간의 도전과 과학으로 적극 대처해야 하겠지만, 도달할 수 없는 ‘초과학’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생 가운데 생존의 지혜, 어차피 ‘With Corona’의 시대는 오고 있다.

 

[한마당] 동맹바라기의 업보

 

지난 9월24일 캐나다 국민들은 전혀 낌새를 몰랐던 대형 뉴스가 터져나왔다.

밴쿠버에 억류 중이던 중국 통신장비회사 화웨이의 부회장인 ‘멍완저우’라는 여성이 전격 석방돼 중국으로 떠나고, 중국에서는 간첩혐의로 옥살이를 하던 캐나다인 마이클 스페이버와 마이클 코브릭 씨가 역시 전격 석방돼 캐나다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세여객기까지 동원해 멍완저우를 ‘모셔간’ 중국은 마치 국빈방문 영접 행사처럼 그녀의 귀환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법석을 떨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적 승리’라고 안팎에 선전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인질로 잡아두었던 두 명의 캐나다인 석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뉴스에 올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캐나다는 화풀이 대상이었을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자국민이 억류되는 바람에 속앓이를 해왔던 캐나다는 어떻든 앓던 이 빠지는 격이어서 특별기를 보내 두 사람을 데려왔고, 트뤼도 총리는 25일 캘거리 국제공항에 직접 나가 이들을 포옹하며 환영했다.

그런데 이 희대의 사건에서 캐나다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따져 봐도 이해가 안되는 허탈감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과문(寡聞) 탓인가, 국제정치 역학에서 당연한 일인데 너무 과민한 것인가.

 

들리는 바로는 미국 법무부와 중국 정부가 멍완저우의 기소 연기에 합의하면서 캐나다 법원이 그녀의 범죄인 인도 재판을 기각하고 연금해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중국도 '멍완저우 석방용 교섭 카드'로 중형을 때려 감금했던 캐나다인 두 명을 석방했다. 그 해결과정에 캐나다의 표면적인 역할은 없었다. 거론도 되지 않았다. 캐나다는 두 강국 간 대립에 말려들어 실컷 수모를 당하기만 하고는 그들이 화해한 덕에 어정쩡하게 수렁을 벗어난 것이다.

 

멍완저우가 밴쿠버에 있었던 것이 발단이기는 하지만, 캐나다가 처했던 신세는 미국이 중국을 격하게 몰아부치는 압박에 공연히 말려들어 미국의 행동대요 총알받이가 되었고, 선량한 자국민들이 인질로 잡히는 유탄을 맞아 3년간 곤욕을 치른 게 전말이다. 바꿔 말해 미국의 몇 마디에 따라 ‘죄인’을 억류해 주었을 뿐인데,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지는 않고 만만한 캐나다인들을 붙잡은 중국의 돌려차기에 얻어맞고 비틀거렸던 것이다. 공권력 허비와 원칙없는 사법판단, 외교와 무역의 마찰, 국민 수난 등 손해만 잔뜩 보고, 나라 위상마저 애매 해졌으니, 세계 최강국을 이웃 우방으로 둔 업보인 것일까.

 

두 달 전 철수사태가 벌어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와 영국·프랑스 등 우방국들은 도주하듯 철군해버린 미국에 뒤통수를 맞고는 ‘맹방’의 허구와 자국 이익에만 철저히 몰두한 ‘양키’의 비정함을 절감해야 했다.

 

동키호테처럼 종잡을 수 없던 장사꾼 트럼프가 사라진 뒤 “미국이 돌아왔다”며 기대를 부풀린 바이든이 등장했지만,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실망이 커져가는 모양새다.

지난 9월15일 영국·호주와의 ‘오커스’(AUKUS) 동맹 결성을 발표해 또 하나의 파장을 부른 게 결정적이다. 화기애애했던 G7 정상만남 때부터 다른 우방을 따돌리고 3국이 은밀히 논의해 왔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배신감은 컸다. 특히 호주와의 잠수함 수출계약까지 파기된 프랑스는 즉각 대사소환 등 노발대발했다. 장 이브 르드리앙 외무장관은 “트럼프나 할 만한 행동”이라고 성토했고,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장관도 “미국이 동맹국을 어떻게 대했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고 칼을 갈았다.

 

살벌한 국제사회에서 동맹국은 필요하고 국익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역사적인 전통의 맹방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피로맺은 혈맹이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알 수 없고 영원한 적도 없는 게 인간사회다. 결코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는 나라는 없다.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했다지만, 6.25를 부른 분단의 설계자는 자국전략을 우선한 미국이었다. 한국을 따돌리고 정전협정을 맺은 미국은 지금껏 종전(終戰)의 열쇠를 건네지 않고 있다. 일제를 철저히 징벌하고 해체시키지 않아 지금까지 친일 잔재와 독도와 극우일본 등등의 골치아픈 문제들이 횡행하는 것도 시발은 미국의 계산에서 비롯됐다.

 

신냉전이 조성되는 글로벌 전략의 소용돌이에서 막연한 선의의 ‘동맹바라기’나 ‘동맹 우산살이’가 과연 바람직한 생존전략인지. 어정쩡한 강국들인 캐나다도, 한국도, 도약을 위해서는 ‘자국이익’을 깊이 성찰해 보는 게 현명한 일이다.

 

[편집인 칼럼]  선택적 불의와 방종

[한마당] 불변의 법치농락 카르텔

 

법원과 검찰을 출입하던 법조 기자시절 기억나는 이야기다.

아침에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다 보면 얼굴이 부시시 하고 충혈된 눈에 열심히 껌을 씹는 검사를 볼 때가 있다. 야근에 지쳤거나 어떤 스폰서와 밤을 지샌 것이려니 궁금해 슬슬 몇 마디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역시 주취 탓이다. 민망했는지 공연한 선심성 빈말도 빼놓지 않는다. 다음에는 꼭 연락 할테니 같이 한 잔 하자구….

 

그날 검사들을 접대했던 ‘스폰서’는 모 행정관서 공무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종의 비리혐의로 그 관서의 장이 몇 차례 검찰청을 들락거렸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후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라니…. ‘증거’를 쥐고는 곧바로 차장검사에게 쫓아가 유도질문을 꺼내는 기자에게 차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 그 친구, 강 검사가 불러서 알아봤는데, 뭐 별거 아니더라구”란다. 부하직원이 승진 청탁을 하며 봉투를 건넸다는데, 수사해보니 이미 돌려주었고, 액수도 미미해서 그 기관장을 혼내주되 기소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 기관장의 비위는 돈 싸들고 청탁한 부하들이 여럿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했지만, 알고보니 그의 동생이 정보기관에 있었고, 결국 불문에 부치는 봐주기로 끝냈던 것이다. 어쩐지 수사는 시작했는데 그 뒤 감감 무소식이더니, 슬그머니 덮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선처에 보답하느라 검사를 모셔다 양주에 곤죽이 될 정도로 향응을 베풀었고….

 

공직 기강과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검사가 공직자의 범죄를 덮어버리고, 형벌권과 기소권을 행사하지 않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에, 청탁을 들어 준 대가로 접대를 받은 ‘사후 수뢰’까지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부정한 금품을 주고 받았던 행정관서 부패 공무원들은 본분을 저버린 부정청탁에 국민의 세금으로 향응을 ‘공여’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선량한 국민들과 국가에 고스란히 피해를 전가한 것이다. 검찰도 행정기관도 철퇴를 맞아야 할 사안이 분명했다.

 

취재를 확인한 검찰과 해당 관서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확실한 팩트의 기사였지만, 분통을 터트리는 기자에게 편집 데스크는 “김 기자, 방법이 없네, 중정(中情)에 보안사에, 총동원됐어, 이해하게!”하곤 달랠 뿐이었다. 신문사도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 있는 때 였으니, 언론의 자유와 사명이란 단어는 고상한 수사에 불과했고, 분기탱천을 삭이며 위험한 줄타기에 도전해야 했다.

‘인혁당 사법살인’처럼 초대형 공작은 아니어도, 검찰은 물론 법원까지 그런 식으로 크고 작은 민·형사 사건들이 왜곡·조작되거나 묻히는 사례는 당시에 흔치않게 있었다. 언론 역시 재갈이 물린 채 공생의 멍에와 카르텔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때가 언제적 인데, 그런 법조 안팎의 속성과 풍속도가 바뀌기는 커녕 고착화·지능화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이 되고 있는 근래의 사건들에서 뚜렷하게 그 불편한 실체를 본다. 널리 알려진 노무현 수사와 이명박 BBK사건을 필두로, 김학의 사건, 옵티머스 사건 등 일탈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흐지부지 덮어버린 ‘나경원 사건’과는 달리, 수사도 하기 전에 기소해버린 ‘조국 사건’에, 최근의 이른바 ‘고발 사주’ 사건까지. 사회정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참 교활하고 사악한 선택적 형벌권의 민낯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 카르텔의 일원으로 헤어나지 못하는 언론까지….

 

공직 당사자와는 관련없는 일가친족을 ‘멸문’지경으로 내몬 무지막지한 별건·연좌제 수사의 비열한 숫법은 조폭의 칼부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런 냉혹한 칼끝이 정작 자신에게 향한다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검찰총장의 일가를 집적거렸다고 친위검사가 고발장을 만들어 야당과 민간단체에 고발을 ‘청부’했다는 폭로는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방어를 위해 국가사법체계를 악용한 범죄요 법치농락에 다름 아니다.

 

어디 검찰 뿐인가. 사법거래를 일삼았던 대법원장과 행정처의 판사들은 법관의 양심은 팽개친 채 뭘 잘못했느냐고 고개를 쳐들고, 제식구 감싸기 덕에 면죄부를 챙겨 다시 재판을 맡아서는 보복하듯 요상한 판결을 쏟아낸다.

 

과거 독재시대 무소불위로 저지른 정치공작과 조작의 그림자, 멀게는 일제치하 고등계 형사들의 악독했던 행적의 뿌리가, 여전히 21세기 민주정치 시스템의 그늘아래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고도 경악할 일이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죄의식도 미안한 양심도 없다. 오히려 큰소리치며 역정을 낸다. 그들은 민주화든 문민화 든 관심도 변함도 없이 손에 쥔 권력을 즐기며 안주해왔기에, 늘상 그런 습벽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국민을 ‘돌보겠다’니, 위장된 양의 손을 내민 늑대처럼, 소름 돋을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검찰 개혁, 사법개혁·언론개혁을 통한 카르텔 혁파는 여전히 미완 상태인 이 시대 최우선의 국가적·국민적 과제다.

                                                                                              < 김종천 시사한겨레 편집인 >

 

 

[편집인 칼럼-한마당]  선택적 불의와 방종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기 원한다. 하기 싫은 일은 피하고 미루기 일쑤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싫증이 나고, 더디고 힘들다. 그래서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유의지가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을 택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매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따른다. 마땅히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 집중’,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과 권리와 한계는 비단 개인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부여받고도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의 길을 간 것처럼, 자유의지는 끊임없이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재촉한다. 선악과를 택한 순간의 탐욕이 에덴 추방을 불렀고, 자손만대를 징벌의 세계로 내모는 천추의 한을 낳았다.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마침내 거대한 태풍으로 번지듯이, 작은 선택의 여파가 미래의 진로를 좌우한다.

 

무미건조한 주제지만, 되짚어 봐야 할 절실한 화두다. 개인을 위한, 나아가 공공을 위한 지혜롭고 공의로운 선택과 집중의 길을 심각하게 재론해 봐야할 이유, 사회적 공정과 정의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삶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 피하고 싶어도 부딪혀야 하는 사안들이 허다하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들도 많다. 그래서 공공을 위한 직업인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적 행동에는 제약과 규범이 있고, 직업윤리도 엄존한다.

 

그런데 단체나 회사에서 혹은 공조직에서 개인적 선호나 이기적 태도로 불의한 자유의지의 고수나 자의적 행동에 몰두 한다면, 그는 공인(公人)이기를 포기했거나, 자질과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직업의식과 책무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면 전혀 자신의 취향과는 달라서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경우, 그도 아니면 나태와 해이, 혹은 유착과 편애 등의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교사가 자기 좋아하는 학생만 가르치고 다른 학생들은 알아서 공부하라고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소방관이 불끄기 싫어 화재현장에서 불구경만 하다가, 막상 자기 집에 불이 나니 초특급 출동해선 동료들 빨리 안온다고 난리친다면?

경찰이 도둑은 보고도 모른 체 하고는 교통단속만 나선다고 고집하면?, 혹은 지인은 잘 봐주고, 괘씸죄 대상은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인다면…틀림없이 그 사회는 엉망이 될 것이다. 미래는 희망이 사라지고 먹구름이 뒤덮을 수밖에 없다.

 

결코 있어서는 안될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실제 상황임을 부인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권력을 쥔 자들의 본분을 저버린 선택적 일탈이 도를 넘었다.

대표적인 권부라고 할 검찰, 법원, 언론, 그리고 정치인들이, 공동체를 위한 봉사자라는 공직인의 책무를 망각한 채 ‘유착과 편애의 선택적 자유의지 발동’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근래 선명하게 드러난 검사들의 선택적 표적-기획수사 습성은 검찰개혁에 거세게 반항하며 질긴 파열음을 내고 있다. 판사들은 법과 양심을 팽개치고 사법농단을 감싸면서 서슴없는 감정적 판결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미 ‘기레기’니 ‘구더기’ 소리를 듣는 언론들은 자사 이기와 진영에 매몰된 선별보도로 국민을 오도하며 양극화와 대결을 부추긴다.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은 안중에 없이 오직 권력쟁취에만 눈먼 헐뜯기와 혹세무민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안타깝게도 생생했던 기억을 벌써 잊어가고 있지만, 가깝게는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길어도 한 세기가 채 안된다.

서슬퍼런 권력 앞에 국회는 거수기였고, 기자와 언론은 어용 나팔수들이었다. 검사들은 권력의 개 답게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었을 뿐이다. 판사들은 개들이 짖는 구형대로 앵무새 판결에 자족하며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 자유의지와 선택은 사치였다.

 

굴종과 침묵이 능사였던 그들에게 어느 날 권력의 자유의지가 선한 ‘시혜’를 베풀자, 원죄의 습성과 사악한 근성이 살아난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의지의 선한 선택은 방종이고 무법이고, 불의에 다름 아니었다.

검찰과 법원의 선택적 양심과 정의, 언론의 표적 보도와 편의적 곡필, 적폐 정치인들의 내로남불…그야말로 선을 악으로 갚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들에게는 자유의지를 부여할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근자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역사가 거꾸로 갈 조짐이다. 이 망국적 선택의 불의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조바심이다. 저들에게 치욕의 시대 기억을 되찾아 주어야 비로소 깨어들 날지 모른다.

 

결국은 국민과 집단지성의 선택이 가장 강한 무기가 아니겠는가. 다시 촛불을 들어도 좋다. 광장의 촛불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에, 눈길 마다에 촛불을 살리는 것이다.

사그러드는 개혁의 불씨, 선한 선택의 횃불을 활활 살려서, 저들의 방종과 악습을 불살라 태우는 것이다. 공정과 정의를 바로세울 최선의 길은 바로 깨어있는 국민의 자유의지와 선한 선택의 힘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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