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기사종합]

● COREA 2021. 10. 27. 01:1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27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 마련

 

전두환(90)씨와 함께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13대)이 26일 숨졌다. 향년 89.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등으로 10여년간 투병 생활을 이어온 노씨는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며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병원 도착 1시간 뒤인 오후 1시46분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노씨가 세상을 떠난 이날은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된 10·26 42주년이 되는 날이다.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현 대구)에서 태어난 노씨는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씨와 함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세력을 키우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자 그해 12월12일 전씨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았다. 이후 2인자로 군림하며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민주항쟁이 계속되자, 민정당 대선 후보로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양김 분열 속에 치러진 그해 12월 대선에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하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관여하면서 ‘전두환의 후계자’로 대통령에 오른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갑다. 다만 대통령 재임 시절 추진한 북방외교 및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 퇴임 뒤인 1995년 11월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노씨는 전씨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내란죄 등으로 징역 17년, 추징금 2688억원이 확정됐다. 그해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처로 복권됐다. 노씨는 전씨와 달리 2013년 추징금 전액을 납부했다.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병상에 누운 노씨를 대신해 2019년부터 올해까지 다섯 차례 광주를 찾아 5·18 유혈 진압에 사과하고 5·18 민주묘역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씨와 딸 소영, 아들 재헌씨가 있다. 빈소는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이승준 기자

 

노태우, 응급실에서 임종…서울대병원장 “다계통 위축증 등 투병”

 

서울대학교병원은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인에 대해 “장기간 와상 상태에 동반된 폐색전증 혹은 패혈증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27일 오전 10시에 마련될 예정이다.

 

김연수 서울대학교병원장은 이날 저녁 6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 전 대통령이 다계통 위축증으로 투병하며 반복적인 폐렴,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심부정맥혈전증으로 치료를 지속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 병원장은 “최근에는 와상 상태로 서울대병원 재택의료팀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고 설명했다.

 

김 병원장은 “노 전 대통령이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여 이날 낮 12시45분께 응급실을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해 오후 1시46분에 서거했다”고 말했다. 노씨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통증에는 반응했으나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가족 중 1명이 노씨의 임종을 지켰다.

 

노씨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빈소가 미처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도 서울대병원은 취재진들로 붐볐다. 빈소는 27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층에 차려질 예정이다. 2015년 11월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장 큰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하지만 현재 1호실에 다른 고인의 빈소가 마련돼 있어 노씨의 빈소는 다른 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다. 딸 노소영 아트센트 나비 관장 등 유족은 이날 오후 장례식장을 찾아 병원과 장례 절차를 논의했다.

 

한편, 노씨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전두환(90)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조문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전 전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어 “눈물만 지으시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씨의 빈소 방문 계획을 묻는 말에 “못 가실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하시다. 빈소에 사람들도 많은 것 아닌가. 가서 앉아 계실 수도 없다”고 했다. 이주빈 김윤주 박지영 기자

 

노태우 유언 “제 과오들에 깊은 용서 바란다”

유족 “장지는 정부와 파주 통일동산 협의중”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7월7일 민족 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 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26일 숨진 노태우 전 대통령 유족들이 노씨가 사망하기 전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노씨 유족들은 이날 저녁 성명을 내어 “많은 분들의 애도와 조의에 감사드리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기신 말씀을 전해드린다”며 노씨 유언을 공개했다. 이들은 노씨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어 유족들은 노씨가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노씨가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기 바랐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장례 절차는 정부와 협의 중이다. 장지는 이런 뜻을 받들어 (대통령) 재임 시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이라고 했다. 이주빈 기자

 

허탈한 5·18단체들 “노태우씨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

 

노씨, 5·18 자위권 발동 건의 회의 동석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유족 분열 유도

노씨 가족, 광주 6차례 방문해 사죄 표명

광주시민 “5·18 왜곡한 회고록 수정 먼저”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이 전두환씨 등과 함께 1995년 12·12 군사반란, 내란 등의 혐의로 1심 법정에 선 모습.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광주 5·18단체와 시민사회는 “광주학살의 진상을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났다”며 허탈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5·18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은 이날 오후 성명을 내어 “노태우는 죽더라도 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죄와 고백, 5·18을 왜곡한 회고록을 교정하지 않은 노씨는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재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노씨는 5·18 진상규명에 비협조적이었고 공개적인 정식 사죄가 없었다. 전두환씨 등 나머지 신군부 세력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진정성 있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씨와 전씨 등 직접조사를 추진했던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당황스럽다는 분위기다. 조사위는 성명에서 “고인은 지난 41년간 피해자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무런 언급없이 떠났다. 나머지 핵심인물 35명 등은 지속적이고 엄정하게 조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씨와 광주의 악연은 5·18 당시부터 시작됐다. 1980년 5월21일 새벽 발포를 의미하는 계엄군의 자위권(자기보호) 발동이 결정됐던 회의 자리에 노씨는 전씨 등과 함께 참석했다. 1980년 8월 전씨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노씨는 희생자 유족 사찰과 분열유도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노씨는 생전 광주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저항했다”며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5·18단체는 회고록 정정을 촉구했지만 노씨 쪽은 반응이 없었다.

 

노씨 가족은 그동안 여러차례 광주를 방문해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광주 시민사회는 회고록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8년 2월25일 부인 김옥숙씨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 이한열 열사 묘를 참배한 이후 2019년 8월 장남 재헌씨가 31년 만에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노씨 대신 사죄했다. 재헌씨는 같은 해 12월, 지난해 5월, 올해 4월과 5월 광주를 찾았다. 딸 소영씨도 2019년 12월 전남대병원 어린이병원에 1천만원을 기부하며 광주와 인연을 이어갔다.

 

일각에서는 ‘반성 않는 전두환에 비하면 낫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노씨의 국립묘지 안장을 위한 행보’라는 시선을 받았다. 김용희 기자

 

전두환, 노태우 사망에 말 없이 ‘눈물’ …빈소 방문은 어려울 듯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에 전두환(90)씨가 눈물을 보였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막역한 친구사이였던 두 사람은 12·12 군사쿠데타를 함께 주도했다.

 

전두환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전 전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어 “눈물만 지으시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씨의 빈소 방문 계획을 묻는 질문에 “못 가실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하시다. 빈소에 사람들도 많은 것 아닌가. 가서 앉아 계실 수도 없다”고 했다.

  

전·노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노씨는 전두환 정권에서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지내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는 등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노씨가 대통령이 된 뒤 ‘5공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 관계는 멀어졌다. 두 사람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나란히 구속돼 법정에서 손을 잡은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경욱 기자

 

전두환 친구에서 후계자까지…‘2인자’ 노태우의 일생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탓에 대외 활동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이어간 지 10여년 만이다. 향년 89. 노태우씨는 전두환씨와 함께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관여하면서 신군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했고 전씨의 후계자로서 대통령까지 올랐다.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시절 ‘6·29 선언’과 대통령 재임 시절 북방·통일정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긍정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군사반란과 민중학살의 주범이기도 하다. 퇴임 뒤 비자금으로 옥살이를 하고 서훈도 박탈되는 등 말로는 편치 않았다.

 

전두환 잇는 ‘2인자’로 승승장구

 

노태우씨는 1932년 12월4일 팔공산 근처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서 노병수와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통사고로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일찍 잃은 노씨는 숙부(노병상)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구 공산국민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해 그곳에서 동기인 전두환, 정호용을 만났다.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인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을 거쳤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다. 이어 수도사단 대대장, 보병 연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서울에 인접한 고양에 위치한 육군 9사단장이던 그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체포하고, 무단으로 군을 서울로 진입시키는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이튿날 9사단장에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노씨는 1980년 5월17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군부의 정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해 8월 전씨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노씨는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이어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에 임명되는 등 5공화국의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후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6·29 선언’ 뒤 대통령 당선…‘북방외교’ 성과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씨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씨는 신군부 세력 ‘2인자’의 이미지를 씻고, 전씨와 차별화하면서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전두환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씨는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였다.

 

그러나 노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인 1988년 치러진 4·26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다. 전두환씨는 당시 국회에 나와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씨는 1989년 12월31일 전씨의 국회 답변을 끝으로 ‘5공 청산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1990년 1월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이끌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해 정치적 위기를 모면했다.

 

노씨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튼 뒤,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구권과 수교를 넓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런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구권의 몰락, 미국의 세계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씨는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중평이다. 노씨는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한 비밀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씨는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1989년부터 실시됐다. 그러나 노씨가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들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씨는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씨는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퇴임 뒤 비자금, 군사반란 혐의로 단죄…오랜 투병 끝 사망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노씨는 퇴임 2년8개월 만인 1995년 10월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은행 잔고조회표를 흔들면서 촉발한 ‘노태우 비자금’으로 완전히 몰락한다. 당시 신한은행 이사가 서소문지점장 재직 때 300억원이 입금된 차명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하고, 노씨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검찰에 자진 출석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통치자금”이라고 실토하면서 노씨를 향한 국민적 비난이 빗발쳤다. 파장이 커지자 노씨는 그해 10월27일 “재임 중 약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비자금 실체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씨를 소환조사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36명을 불러 조사했다.

 

노씨는 그해 11월16일 뇌물수수 혐의로 헌정사상 처음 구속되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이어 12월3일엔 전두환씨가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따른 신군부 세력 단죄였다. 대법원은 뇌물 수수, 군사반란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해 노씨에게 1997년 4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확정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를 두달 남겨둔 그해 12월22일 “국민 대화합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며 노씨와 전씨를 특별사면했다. 그해 12월18일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씨와 전씨 사면에 동의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6년 3월 참여정부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관련자 176명의 서훈과 훈장을 모두 박탈했는데, 노씨는 이때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각종 서훈을 박탈당했다.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 파란만장한 삶을 끝마친 노씨는 천식 등 지병이 악화돼 최근까지 10년 이상 대외 노출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했다. 2011년에는 기관지에서 한방 침이 발견되기도 했고, 올해 4월9일에는 호흡곤란을 겪어 119구급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노현웅 기자

 

‘내란죄’ 노태우, 현충원 안장되나…국민 정서가 관건

내란죄 특별사면 실효 논란 .. 국가장 여부도 ‘정무적 판단’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26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내 전시관에 노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관련 법률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국립묘지법상 전직 대통령은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자이지만 노태우씨는 1997년 내란과 군사 반란 등의 죄명으로 대법원에서 17년형을 선고받았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는 내란죄를 지은 사람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노씨는 복역 중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특별사면 대상자의 국립현충원 안장자격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노씨와 전두환씨가 고령이 되자 이들이 숨진 뒤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느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립현충원 담당 부서인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6일 노씨의 국립현충원 안장과 관련해 “내란죄 유죄 선고 뒤 사면을 받았지만 내란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립묘지법상으로 안장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앞서 2019년 1월 보훈처는 전두환씨 경우에도 “내란죄 사면 복권자는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보훈처의 이런 입장은 국립묘지 관장부서의 행정해석이란 한계가 있다. 앞서 ‘5공 비리’ 수사로 뇌물죄가 확정됐던 안현태 전 경호실장은 사면·복권됐다는 이유로 5·18 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2011년 국립묘지에 묻혔다. 당시 안씨 쪽은 “형 선고의 효력으로 인하여 상실되거나 정지된 자격을 회복한다”는 사면법의 내용을 근거로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잃었더라도 사면·복권으로 그 자격을 다시 얻었다고 주장했고, 이명박 정부 보훈처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 규정의 모호성과 규정 간 충돌로 결국 노씨의 국립현충원 매장을 결정할 잣대는 국민 정서와 이를 고려한 정부의 정무적 판단이다. 국가장 여부도 마찬가지다. 국가장법에서는 △전·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에 한해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예우가 박탈된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 여부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노씨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해 “국민들의 수용성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정무적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절차가 필요하다. 내부 절차에 따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윤영덕·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5월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역사적 단죄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노태우씨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장 예우를, 국립묘지에 안장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5월 단체는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처벌까지 받은 사람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면 후세 가치관의 혼란을 줄 수 있다”며 반대했다. 권혁철 김양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