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에 대한 역대 최고 지원액 50억달러 요청

“900만명 심각한 기아, 어린이 320만명 영양실조”

탈레반 재집권 뒤 경제난 · 가뭄 이어져

여성 억압 정책에 미 동결자산 해제 않고 제재 지속

 

지난 12월14일 아프가니스탄 북서부 바드기스주의 주도인 칼라에나우에 남성 주민 수백명이 인도적 지원 물품을 받기 위해 모여 있다. 유엔(UN)은 11일 굶주림 등 아프간의 ‘인도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총 50억달러에 이르는 지원을 요청했다.칼라에나우/AP 연합뉴스

 

유엔(UN)이 인구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심각한 ‘인도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총 50억달러(약 5조9600억원)에 이르는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1945년 유엔 설립 이후 한 나라에 대한 지원 요청액으로는 사상 최대 액수다.

 

마틴 그리피스 유엔 긴급구호조정관은 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늘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하는 총 44억달러에 이르는 모금 계획을 시작하려 한다. 이는 인도적 도움이 필요한 단일 국가를 위한 역사상 가장 큰 액수”라고 밝혔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UNHCR) 고등판무관도 아프간 주변 5개국으로 흩어진 난민 지원을 위해 추가로 6억2300만달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두 액수를 합치면 유엔이 요청한 지원액은 총 50억2300만달러에 이른다.

 

그리피스 조정관은 아프간의 미래를 위해 이 돈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아프간인들에게 문을 닫지 말아 달라. (이 나라에) 넓게 퍼진 기아, 질병, 영양 불균형과 그로 인한 죽음을 없애기 위해 각국의 출연이 필요하다. 돈이 모이지 않으면 아프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또, 올해 원하는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내년 요구액은 100억달러로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8월 미국이 철수한 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권력을 재장악하며 아프간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3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에 더해 탈레반 정권을 승인하지 않는 미국 등의 경제 제재가 겹친 탓이다. 미국 등은 현재 탈레반의 아프간 국외 자산 약 90억달러를 동결하고 있다. 그로 인해 필요한 식량 수입이 이뤄지지 않으며 식량난이 가중되고, 아프간의 공무원과 공공 의료기관 종사자들에게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나라 전체가 굶주리는 광범위한 인도적 위기가 시작됐다. 유엔은 아프간 전체 인구 55%에 해당하는 2300여만명이 식량 부족, 이 가운데 900여만명은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은 아프간의 5살 이하 아동 중 320여만명이 이번 겨울 영양실조 상태에 처할 우려가 있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으면 100여만명이 숨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중이다. 그 때문에 미 하원의원 40여명은 지난달 15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에게 “탈레반이 아니라 아프간 사람들에게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는 조처를 하길 권고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은 심각한 경제난에도 1차 정권(1996~2001년) 때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달 26일엔 새로 만든 권선징악부를 통해 여성이 72㎞ 이상 장거리를 이동하려면 남성 가족을 동반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놨다. 그 전에는 대학 내 여성의 히잡 착용과 남녀 분리 수업을 도입했고, 방송국엔 여성이 나오는 드라마를 방영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아프간 자산의 동결 해제 등 미국의 정책 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요 20개국(G20)은 지난해 10월 화상 정상회의를 통해 아프간에 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원조는 독립적인 국제기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탈레반에 직접 지원되어선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의 요청이 공개되자 미국은 11일 아프간에 올해 3억800만달러와 100만회에 이르는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에밀리 혼 미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 대변인은 “지난해 10월 이후 미국이 아프간과 아프간 난민들에게 제공한 인도적 지원액은 7억8200만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밝혔다. 길윤형 기자

 

“카불에서 6개월 간 임금 안 보내”…주중 아프간 대사 사임

카엠 대사, 트위터로 ‘사임’ 발표

“외교관 대부분 이미 떠나”

각국 주재 아프간 대사관 혼란상

 

자비드 아흐마드 카엠 중국 주재 아프간 전임 대사가 지난해 12월31일 국기가 내걸린 대사관 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1월1일부로 대사직에서 물러났다. 트위터 계정 갈무리

 

“영예로운 임무가 끝났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국민을 대표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자비드 아흐마드 카엠 주중국 아프간 대사가 지난 11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대사직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도 카엠 대사가 ‘이임’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그는 “사임을 결정한 개인적인 이유도, 직업적인 이유도 많지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겠다. 인수·인계 서한을 통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담아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카엠 전 대사는 지난 1일부로 대사직을 사임하면서 남긴 서한에서 대사관 은행 잔고와 소속 현지인 직원 임금, 대사관이 운행하는 차량 5대 관리 문제 등 일상업무 관련 내용을 빼곡히 적어 후임자에게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 통신은 12일 “지난해 8월 탈레반의 카불 입성 이후 지금까지 급여가 전혀 지급되지 않았으며, 주중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아프간 외교관 대부분이 카엠 전 대사보다 먼저 중국을 떠났다”고 전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카엠 전 대사는 지난 1일 아프간 외교부에 보낸 서한을 트위터에 공개하고, “지난 6개월 동안 카불에서 급여를 송금하지 않아,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따로 위원회를 꾸려 대응해 왔다. 1월1일 현재 대사관 계좌에는 10만달러 가량의 잔고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현재 베이징 주재 아프간 대사관에는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중국인 직원 1명만 근무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아프간 귀국 여부를 포함해 카엠 전 대사의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 2019년 11월 부임한 카엠 전 대사는 지난해 7월 언론 인터뷰에서 탈레반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채 한달도 안돼 탈레반은 카불에 입성했고, 이후 외국 정부의 원조 중단 및 계좌 동결 조치가 이어지며 아프간은 심각한 경제 위기로 빨려 들었다. 카엠 전 대사와 같은 처지에 내몰린 아프간 외교관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세계 각국 주재 아프간 대사관 대부분이 주중 대사관과 마찬가지로 이전 정부가 임명한 외교관들이 남아 있는 등 혼란스런 상황”이라며 “최근 이탈리아 주로마 아프간 대사관에선 해직된 외교관이 ‘자신이 후임자’라며 현직 대사를 폭행해 경찰이 출동하는 사건도 벌어졌다”고 전했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